2020년 12월 11일 금요일

가회동 서측 걷기

조동사의 부정문 만들기

[편집자 주 : 서울특별시 생활속민주주의학습지원센터가 공모한 「2020년 시민참여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협)마을대학종로의 ‘기가 막힌 FAKE 뉴스’가 선정되어, 8월27일(목)부터 10월8일(목)까지 5회에 걸쳐 최병현, 변자형, 김수민, 김서중, 윤호창 강사가 주제에 따라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중 2번째 프로그램인 9월12일(토) 현장답사에 대한 내용을 두 편으로 나누어 송고합니다. 탐방 주제는 「조동사(朝東史)의 부정문(不正文) 만들기」입니다.]

(1편에 이어서…)

김형태가옥 경성사진관
고하길 서쪽 끝자락 중앙고입구 삼거리에서 북촌로를 따라 50m 남하하면 김형태가옥이다. 1930년대에 여러 필지로 쪼개져 개발된 종부사장(宗簿司長) 이달용(1883~?) 소유의 옛 땅에 ㄱ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 ㅡ자형 문간채로 건립된 김형태 가옥은 당시 북촌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에 비하여 큰 규모와 격식을 자랑한다. 1999년 가회동의 도로 확장으로 대지의 일부가 잘려나가고 높은 축대가 쌓였는데, 지금은 한옥스튜디오 경성사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30m 남쪽에는 1976년 김경섭·김충섭·김정섭(김강유) 3형제가 설립한 도서출판 김영사의 서울사무소가 있다. 기자가 읽은 김영사 최고의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문득 이번 탐방 내용인 페이크(Fake)와 부정문(不正文, 바르지 않은 글)을 생각해 보기에 어울리는 책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동 석정보름우물을 통해 살펴봤듯이 북촌 가회동은 1795년 4월5일 주문모 신부 집전으로 조선땅의 첫 정식 미사가 봉헌된 역사적인 공간이다. 북촌로쪽 마당에 춘향목 적송(赤松)으로 꾸민 사랑채를 내고 안쪽은 현대식 성전으로 치장한 지금의 가회동성당은 주변의 기와지붕 집들과 어울리는 조화로움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안마당, 성지마당, 아랫마당, 미니마당, 하늘마당 등 5개의 마당 공간이 성당의 설계 중심이 된 것도 특이한 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올라가 보글보글한 한옥지붕을 조망하는 것은 또다른 가회(嘉會, 아름다운 모임)가 된다.

주변과 조화로운 가회동성당
가회동성당에서 200m 남단, 가회동주민센터 위쪽에 손병희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의 뒤를 이어 1897년에 동학 제3대 교조에 올랐다. 손병희는 일제가 침탈한 국권을 10년 안에 되찾겠다고 다짐하고, 1912년 강북구 우이동에 12칸짜리 ‘의창수도원’을 세워 인재양성 교육을 시작했다. 1914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배출한 483명의 천도교 인재들은 3·1운동을 준비하고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천도교인이었다. 손병희는 전통이라는 쌀에 항일의 누룩을 빚어 자주독립의 물로 걸러낸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고 전한다.

표석을 보고 오른쪽 북촌로7길로 직진하면 백인제가옥이 나온다. 이곳은 1913년 이완용의 외조카이자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韓相龍)이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집을 짓고 1928년까지 거주한 연유로 ‘한상룡옛집’으로도 불린다. 1935년 개성 출신의 부호였던 언론인 최선익(崔善益)이 사들여 1944년까지 소유했다. 최선익은 조선중앙일보사를 인수하여 발행인을 맡으면서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한 인물이다.
1941년 스승이 운영하던 병원(현 인제대학교 부속 백병원 자리)에 백외과(白外科)를 개업한 백인제(白麟濟, 1899~?)가 1944년 옛 최선익의 집을 인수했다. 평북 정주의 부호 출신인 백인제는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후 1948년 5.10총선 때는 서울 중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력이 있다. 백인제는 6.25전쟁 중 동생인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었다. 백붕제의 아들이 문학평론가 백낙청이다. 백낙청의 형 백낙환이 백부인 백인제의 의업을 이어 백병원과 인제대학교(경남 김해)를 설립했다.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1977)된 백인제가옥은 2015년 1200여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의 저택으로 설정됐다.

북촌로5길 고개는 주변에 붉은 흙이 많아 홍현(紅峴)이라 불렸고, 궁중의 화초를 키우던 장원서(掌苑署)가 있어서 화개동, 줄여서 화동(花洞)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
김옥균·서재필 등 조선정부에 몰수된 개화파 관료들의 집터에 1900년 관립중학교가 설립된 이후 교명이 관립한성고등학교(1906), 경성고등보통학교(1911),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1921),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1922), 경기공립중학교(1938)로 변경돼왔다. 1976년에 경기고등학교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면서 1977년부터 정독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료관동(1927)과 도서관동·휴게실동(1938) 등은 건축 당시 철근콘크리트와 벽돌벽 구조, 스팀 난방방식을 도입한 최신식 학교건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다. 도서관1동과 2동 사이엔 이곳이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에 이름을 올린 외부대신 평재 박제순(朴齊純, 1858~1916)의 집터였음을 알려주는 우물돌이 있다.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바라보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렸던 자리가 정독도서관 정원이다. 갤 제霽,  빛 색色… 비가 그친 후 맑게 갠 하늘색 풍광을 보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의 페이크(Fake)와 부정문(不正文)을 씻어내리는 한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되어주어야 한다.

정독도서관 정문 건너편은 동아일보의 창간사옥 자리(東亞日報創刊社屋址)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1일(목) 박영효를 사장으로 타블로이드판 4면 체제로 창간되었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문맹퇴치와 한글보급을 위한 브나로드 운동, 박정희 정권 하 백지광고 참여를 불러온 불합리한 체제비판의 야당성 등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우리 사회를 뒤흔든 오보도 많이 냈다. 그중에 올해 2월,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 펴낸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보도 100선」 제2장 33편 ‘동아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가짜뉴스’(58쪽)에는 최악의 오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사건이 기술돼 있다.

조선·동아 최악보도 100선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8일에 열리는 삼상회의 결과를 발표 이전에 미리 가짜뉴스로 보도했다. 사실과 정반대로 미리 보도한 것이었다. 사실은 소련이 신탁통치할 이유가 없으니 즉시 독립시키자는 것인데 반해 미국은 5년 이상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타협안으로 5년 신탁통치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에 합의된 것이었지만 동아의 이 같은 가짜뉴스로 우익진영은 즉시 독립시키자고 했다는 미국을 지지하는 ‘반탁’으로, 처음에는 역시 ‘반탁’을 지지했다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신탁통치 합의로 발표되자 ‘찬탁’의 입장으로 돌아선 좌익진영으로 나뉘어 반목 대립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즉시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반탁’을 통해 친일세력을 포함한 모든 우익진영을 단결시키려고 했다. 친일세력은 자신들의 친일경력을 즉시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애국자’로 포장했다. 오늘날 좌우대립이라는 남남갈등의 씨앗은 이렇게 뿌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한민당 송진우 총무(대표)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보도를 보고 “미·영·소 삼상 결정이 세 나라에 의해 합의된 것이고 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발언했다가 다음 날 자택에서 피격 사망하고 말았다. 한민당의 수뇌도 삼상회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임시정부 수립으로 가자고 합리적 판단을 했지만, 우익 친일세력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인물은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처단하려고 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16~26)와 관련해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기사(1945.12.27)는 명백한 오보였다. 민족주의·민주주의· 문화주의를 3대 사시(社是)로 이어오고 있다는 동아일보는 이제라도 우리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오보를 인정하고 앞으로 오보를 줄일 수 있도록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

북촌로5길을 걸어 종친부(宗親府)에 다달았다. 종친부는 임금의 어보(御譜)와 어진(御眞)을 보관하고, 종실·제군의 인사와 분규를 처리하던 관청이다. 경근당·옥첩당 건물은 (구)국군기무사령부 내 테니스장을 짓기 위하여 1981년 정독도서관으로 강제 이전된 후, 2013년 원래 위치로 이전·복원됐다. 종친부(宗親府)의 본채 경근당(敬近堂)과 복도로 연결된 옥첩당(玉牒堂)의 ‘옥’자는 양쪽에 옥구슬이 있는 형상이어서 특이한데, 아스키나 엡시딕 문자로도 어떻게 표기할 방법이 없다. 종친부 옆에는 의빈(儀賓, 부마)의 인사 문제를 관장하는 의빈부가 있었다고 한다.
 
양쪽에 옥구슬이 있는 형상의 독특한 ‘옥’자를 쓰는 종친부(宗親府) 옥첩당(玉牒堂) 현판

종친부에서 율곡로로 내려가는 길의 왼편 송현동 일대가 순종의 장인 윤택영(1876~1935) 후작, 오른편 간동 일대가 윤택영의 형 윤덕영(1873~1940) 자작 형제의 해평윤씨 세거지(世居地)였다.

율곡로1길 좌측의 사간동 법륜사(法輪寺)와 두가헌(斗佳軒)은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금강산 유점사의 경성포교당으로 시작된 불이성 법륜사(不二城 法輪寺)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의 사찰이다. 1950년대 조계종은 독신을 주장하는 비구승(比丘僧, 이판승) 세력과 결혼을 허용하는 대처승(帶妻僧, 사판승) 세력으로 갈등을 겪다가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성립됐다. 그러나 중앙종회 구성에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1970년 1월 박대륜을 종정으로 하는 일파가 통합종단에서 나와 새로이 ‘한국불교태고종(太古宗)’을 발족했다. 태고종은 승려의 결혼문제를 자율에 맡기고 있다.

태고종은 2006년 법륜사 자리에 지하 3층, 지상 4층 규모의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건물을 지었다.

지난 10월26일(월) 언론시민단체들이 조선동아 폐간투쟁 300일을 맞아 ‘100년 언론 대역죄인 조선동아 폐간’을 다시금 촉구했다. 시민실천단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조선동아는 자신들의 영리만을 추구하는 가짜뉴스 제작판매회사이고, 회사에 충성하는 글쟁이 종업원들은 검언유착은 물론 도둑 취재도 감행하며 견제받지 않는 사악한 권력의 극단적인 횡포를 저지르고 있다.”면서 “앞으로 500일, 1000일을 향해 가는 길이 험난해도 조선동아 폐간을 위해 초심을 잊지 않고 투쟁해 가겠다.”고 선언했다.

1993년 신신애는 「세상은 요지경」을 통해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고 설파한 바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맹신은 부정의한 글(不正文)이 일용하는 양식이다.
조선일보도 호시절(好時節)이 있었다. 1920년대 조선일보 계열은 신석우, 안재홍, 이상재 등 일제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좌파 그룹이 사회주의 세력과 함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1927)하기도 했다. 민족주의 우파(타협적) 그룹의 김성수, 이광수, 최린 등 동아일보 및 일부 천도교 계열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일제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산업진흥과 교육개발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는 자치론을 주장한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탐방단은 약 3시간에 걸쳐 「조동사(朝東史)의 부정문(不正文) 만들기」를 살펴봤다. 그러나 지리적인 제약으로 동사(東史)와 관련한 몇몇 현장을 돌아보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조사(朝史)까지 더듬어보기 위해서는 광화문 거리를 지나 보신각 남쪽 청계천변까지 나가야 한다. 좋은 날을 잡아 다시 비판적 걷기에 나서보고자 한다.

9월12일(토) 촉촉한 가을 보슬비 내리던 날, 9人의 페이크 파인더가 『기가 막힌 FAKE 뉴스』 프로젝트 2차 프로그램 「조동사(朝東史)의 부정문(不正文) 만들기」에 참가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종로마을N에도 실렸습니다.

2020년 12월 8일 화요일

계동길 걷기

조동사의 부정문 만들기①

[편집자 주 : 서울특별시 생활속민주주의학습지원센터가 공모한 「2020년 시민참여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협)마을대학종로의 ‘기가 막힌 FAKE 뉴스’가 선정되어, 8월27일(목)부터 10월8일(목)까지 5회에 걸쳐 최병현, 변자형, 김수민, 김서중, 윤호창 강사가 주제에 따라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중 2번째 프로그램인 9월12일(토) 현장답사에 대한 내용을 두 편으로 나누어 송고합니다. 탐방 주제는 「조동사(朝東史)의 부정문(不正文) 만들기」입니다.]

9월12일(토) 오전 10시, 9명의 조동사(朝東史) 순례자가 안국역 3번 출구에 모였다. 안국동(安國洞)은 가회동(嘉會洞), 적선동(積善洞), 서린동(瑞麟洞)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동명이 유지되고 있는 몇 안 되는 동네다.

제생원지(濟生院址) 표지석
계동길 입구에 약재를 취급하는 제생원(濟生院)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얹혀있다. 본래 제생원이 있는 동네여서 제생동(濟生洞)이라 하였는데 ‘제’와 발음이 유사한 ‘계’를 써서 계생동(桂生洞)으로 바꿔 불렀다. 그러던 것이 191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행정구역 대개편 즈음에 계생동이 기생동(妓生洞)을 연상시킨다는 일각의 주장에 따라 ‘계동’으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제생원지 표석 뒤편 옛 휘문중·고등학교 운동장이었던 너른 공간은 현재 현대그룹 빌딩군(群)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빌딩 12층은 2003년 8월 당시 5억 달러 대북송금과 문광부 박지원 장관 150억 비자금에 관련돼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투신한 것으로 보도된 곳이다.

표석 맞은편 계동길 초입은 한학수옛집이다. 1945년 8월15일 광복 당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이에 자극받은 우익 인사들이 3일 후인 8월18일 이곳 한학수가옥 사랑채에서 사회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우익진영 최초의 정당인 고려사회민주당(高麗社會民主黨)을 창당하였다. 
한학수(韓學洙)는 1905년 11월 일본제국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중명전(重眀殿)에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의정부 참정 한규설(韓圭卨, 1856~1930)의 손자 되는 사람이다. 한학수의 옛집이 그대로 남아 현재는 카페 어니언(onion)으로 운영되고 있다.

해방 후 우익진영 최초의 정당인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이 이곳 한학수의 집에서 발기했다.

어니언 카페에서 계동길을 100m쯤 걸어 올라가면 우편에 경우궁지 안내판을 볼 수 있다. 경우궁(慶佑宮)은 조선 23대 순조(純祖)의 생모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신위를 모셨던 곳이다. 갑신정변(1884) 때에는 고종이 잠시 변(變)을 피하여 경우궁으로 이어(移御)하기도 했다. 경우궁은 현재 궁정동 육상궁(칠궁) 내에 봉안돼 있다.
경우궁을 경운궁과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다. 경운궁(慶運宮)은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의 야합으로 친동생 잘산대군(성종)에게 왕위를 도둑맞은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이었다. 1618년 광해군이 계모인 인목왕후(소성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했을 때는 ‘서궁(西宮)’으로 불렸고, 종국에는 1907년 퇴위당한 고종의 궁호(宮號) 덕수(德壽)를 따라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다.

경우궁지 안내판 맞은편은 보헌빌딩이다. 이곳은 본래 일제강점기 마포 거부 임종상이 지은 저택이었는데,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청사로 사용됐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등록문화재 제도가 시행된다는 소문이 돈 이후 청사 건물이 헐려버렸다. 보존·관리에 대한 법적 강제성이 없는 등록문화재 제도의 맹점으로 숱한 사적(史跡)이 사라지고 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있었던 건물이 헐리고 보헌빌딩이 들어서 있다.

앞쪽으로 40m쯤 걸으면 북촌문화센터가 나온다. 구한 말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재무관을 지낸 인물의 이름을 따서 ‘민형기가옥’으로 부르던 곳인데, 민형기의 며느리 이규숙을 지칭하여 ‘계동마님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21년경 대궐 목수가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演慶堂)을 본떠 지었다고 전한다. 내외담이 보이지만, 실제는 툇마루가 사랑채와 안채를 이어주고 있다. 가옥은 2006년 3월 등록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계동마님 이규숙은 1935년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옆 동네인 재동으로 이사를 나갔다.


최소아과의원이 있던 자리
지척에 보이는 2층짜리 붉은 벽돌건물은 1963년부터 2017년까지 54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최소아과의원 자리이다. 2018년 최익순 원장이 작고한 후 옷가게를 거쳐 지금은 이잌 와인바가 들어서 있다.

이잌 맞은편에 승문원지 석판이 보인다. 조선시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담당한 승문원(承文院)은 시대별로 여러 터를 옮겨 다니다가 정조 때 지금의 원위치로 회귀했다.

방향을 바꿔 창덕궁1길 언덕을 올라간다. 언덕 좌우편으로 카페와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잔소리약국과 원조부대찌개가 영업하는 건물은 당진 출신 심우섭(沈友燮, 1890~1946)의 집이 있던 곳이다. 휘문의숙을 1회로 졸업한 그는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과 자주 면담하였고, 태평양전쟁 전시동원을 선전하는 일에 앞장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심우섭의 동생인 감리교 목사 심명섭도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이들은 「상록수」의 작가 심대섭(심훈)의 형들이다. 형제가 추구했던 ‘그날’은 이리도 달랐다.

한성부동산, 利밥 건물은 고양 출신 홍증식(洪增植, 1895~?)의 집터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역임했고,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활동으로 체포된 전력이 있다. 해방 후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선전부장을 지냈다.

왼쪽부터 여운형 집터, 홍증식 집터, 심우섭 집터

대리석 단층의 안동칼국수 건물은 몽양 여운형의 계동집이었다. 중국 시절부터 무려 12번의 테러를 당한 여운형은 명륜동 정무묵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1947년 7월19일 오후, 성북동에서 재미 조선사정협의회장 김용중을 만난 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계동집으로 향하던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평북 출신 한지근의 흉탄을 맞고 운명한다. 몽양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좌절되고 시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8월3일 영결식날, 1936년 당시 점령국을 대표하여 베를린올림픽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을 때 여운형의 독려에 힘입어 출전, 결국 올림픽 챔피언의 영예를 안은 손기정이 여운형의 관을 운구했다.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서울한옥지원센터
여흥민씨삼방파종중이 있는 계동2길을 지나서 왼편으로 꺾어 들어가 서울한옥지원센터, 북촌마을서재, 작은쉼터갤러리를 한꺼번에 둘러본다. 2015년 9월 문을 연 서울한옥지원센터는 문화재수리기능자로 구성된 한옥장인들이 한옥 대중화와 한옥산업 활성화를 목표로 한옥응급센터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자비손한의원을 경유, 다시 계동길에 접어들어 계동피자 왼편 북촌로6길로 진입하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 심용식의 청원산방(清圓山房)을 만날 수 있다.
재동초등학교 북쪽 담장을 면한 곳은 식민사학의 태두 이병도(李丙燾, 1896~1989)의 집터이자 진단학회가 출범한 터전이다. 한때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인간문화재인 대목장 정영진의 손을 거쳐 지금은 한옥 부티크 호텔 락고재(樂古齋)로 재탄생했다.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에게 진단(震檀), ‘벼락 박달나무’는 어떤 의미였을까를 더듬어보는 엄숙한 공간이다.

북촌로6길을 돌아 나와 계동길에 재진입하여 걸어 올라가면 고깃집 중경삼림(重慶森林) 맞은편 골목 끝에 원파선생구거(圓坡先生舊居)가 보인다. 김성수의 백부(伯父)이자 양부(養父)인 원파 김기중의 옛집이다. 김기중은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차례로 인수하여 김성수에게 운영을 맡겼다.

짱구식당 맞은편 대동세무고등학교 진입로 오른편엔 김성수옛집이 있다.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는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넘겨받아 교장을 지냈고, 1919년 10월에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이듬해인 1920년에는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1932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했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른 자치운동을 지지했는데 해방 후에는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언론인·기업인·정치인으로 회자됐다. 김성수의 이름은 2005년경부터 이런저런 친일명단에 수록되는데, 2017년 4월 대법원은 그의 친일 행위를 확정했다. 이후 2018년 2월 국무회의에서 건국공로훈장 복장(현재의 대통령장) 서훈 취소가 의결됐다.

계산(桂山) 정상의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에는 195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에 왕실 살림을 관장한 이왕직 장관(궁내부대신) 관사가 있었고, 민영환의 후손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이 민병진(민영환의 손자)의 구술을 통해 밝혀졌다.

청전 이상범을 사사한 제당 배렴(裵濂, 1911~1968)이 1959년부터 말년까지 살던 배렴가옥은 1926년 무렵 지었다고 추정된다.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가 서로 마주 보는 큰 ㅁ자형 한옥으로 등록문화재 제85호에 올라있다. 배렴 이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상민속학자로 알려진 석남 송석하(宋錫夏, 1904~1948)가 살았다고 해서 ‘송석하가옥’으로도 불린다.

배렴가옥에서 2시 방향 30m 지점은 한용운옛집이다.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고 제3호까지 발행한 유심사지(惟心社址)이기도 하다. 한옥게스트하우스 만해당, 유심당을 거쳐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골목 안쪽에 자그마한 조계종 격외사(格外寺) 도량이 앉아 있다. 근방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답고 특색있는 한옥군(群)을 볼 수 있다.

2013년에 복원된 석정보름우물
계동4길 진입로에 석정보름우물이 있다. 정조 임금 때 천민 망나니의 딸이 언감생심, 병조판서의 서자를 사모하여 상사병을 앓다가 종국엔 도령을 해친 후 시신을 우물에 유기하고 자신도 뒤따라 투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우물물이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져서 ‘보름우물’이라 불렀다 한다. 보름우물은 차고 맛이 좋아 궁에서도 길어갔던 조선시대 소문난 명천(名泉)이었다.
또한 보름우물은 초창기 한국 천주교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1794년 청(清)에서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마티아, 1765∼1795) 집에 은거하면서 조선땅 첫 미사를 봉헌했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컨대 보름우물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수이자 포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자 보름우물이 핏빛을 띠고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계동길과 창덕궁길이 만나는 곳에 중앙고등학교 정문이 보인다. 1919년 1월에 와세다대학교 유학생 송계백이 이광수가 작성한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는 활자와 운동자금을 구하기 위해 중앙고보 교사로 근무중인 보성고보 선배 현상윤을 찾아 중앙고보 숙직실을 찾아오면서 3.1만세운동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중앙고는 원조 한류드라마 「겨울연가」에서 강준상(배용준 분)이 다니던 학교로 등장하는데, 인근의 정유진(최지우 분)네 집터와 더불어 고하길과 북촌3경 일대가 겨울연가 촬영지여서 욘사마와 지우히메를 추억하는 일본 관광객이 꼭 찾는 명소로 오랜기간 유명세를 치렀다.

창덕궁길 서쪽 가회동 5-7번지 양지바른 언덕은 지도에 ‘일민문화기념관’으로 표시된 곳이다. 일민 김상만(金相万, 1910~1994)은 김성수의 장남이자 김병관의 부친이다. 재단은 김상만의 유지를 따라 일민문화상(구 일민예술상), 일민미술관을 운영하며 문화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94년 설립됐다고 한다. 재단 대문에 2008년 작고한 ‘金炳琯’ 이름의 문패가 걸려 있다.

탐방은 북촌로를 지나 가회동으로 이어진다. (2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종로마을N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