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사의 부정문 만들기②
[편집자 주 : 서울특별시 생활속민주주의학습지원센터가 공모한 「2020년 시민참여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협)마을대학종로의 ‘기가 막힌 FAKE 뉴스’가 선정되어, 8월27일(목)부터 10월8일(목)까지 5회에 걸쳐 최병현, 변자형, 김수민, 김서중, 윤호창 강사가 주제에 따라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중 2번째 프로그램인 9월12일(토) 현장답사에 대한 내용을 두 편으로 나누어 송고합니다. 탐방 주제는 「조동사(朝東史)의 부정문(不正文) 만들기」입니다.]
(1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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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가옥 경성사진관 |
고하길 서쪽 끝자락 중앙고입구 삼거리에서 북촌로를 따라 50m 남하하면 김형태가옥이다. 1930년대에 여러 필지로 쪼개져 개발된 종부사장(宗簿司長) 이달용(1883~?) 소유의 옛 땅에 ㄱ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 ㅡ자형 문간채로 건립된 김형태 가옥은 당시 북촌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에 비하여 큰 규모와 격식을 자랑한다. 1999년 가회동의 도로 확장으로 대지의 일부가 잘려나가고 높은 축대가 쌓였는데, 지금은 한옥스튜디오 경성사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30m 남쪽에는 1976년 김경섭·김충섭·김정섭(김강유) 3형제가 설립한 도서출판 김영사의 서울사무소가 있다. 기자가 읽은 김영사 최고의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문득 이번 탐방 내용인 페이크(Fake)와 부정문(不正文, 바르지 않은 글)을 생각해 보기에 어울리는 책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동 석정보름우물을 통해 살펴봤듯이 북촌 가회동은 1795년 4월5일 주문모 신부 집전으로 조선땅의 첫 정식 미사가 봉헌된 역사적인 공간이다. 북촌로쪽 마당에 춘향목 적송(赤松)으로 꾸민 사랑채를 내고 안쪽은 현대식 성전으로 치장한 지금의 가회동성당은 주변의 기와지붕 집들과 어울리는 조화로움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안마당, 성지마당, 아랫마당, 미니마당, 하늘마당 등 5개의 마당 공간이 성당의 설계 중심이 된 것도 특이한 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올라가 보글보글한 한옥지붕을 조망하는 것은 또다른 가회(嘉會, 아름다운 모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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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과 조화로운 가회동성당 |
가회동성당에서 200m 남단, 가회동주민센터 위쪽에 손병희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의 뒤를 이어 1897년에 동학 제3대 교조에 올랐다. 손병희는 일제가 침탈한 국권을 10년 안에 되찾겠다고 다짐하고, 1912년 강북구 우이동에 12칸짜리 ‘의창수도원’을 세워 인재양성 교육을 시작했다. 1914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배출한 483명의 천도교 인재들은 3·1운동을 준비하고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천도교인이었다. 손병희는 전통이라는 쌀에 항일의 누룩을 빚어 자주독립의 물로 걸러낸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고 전한다.
표석을 보고 오른쪽 북촌로7길로 직진하면 백인제가옥이 나온다. 이곳은 1913년 이완용의 외조카이자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韓相龍)이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집을 짓고 1928년까지 거주한 연유로 ‘한상룡옛집’으로도 불린다. 1935년 개성 출신의 부호였던 언론인 최선익(崔善益)이 사들여 1944년까지 소유했다. 최선익은 조선중앙일보사를 인수하여 발행인을 맡으면서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한 인물이다.
1941년 스승이 운영하던 병원(현 인제대학교 부속 백병원 자리)에 백외과(白外科)를 개업한 백인제(白麟濟, 1899~?)가 1944년 옛 최선익의 집을 인수했다. 평북 정주의 부호 출신인 백인제는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후 1948년 5.10총선 때는 서울 중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력이 있다. 백인제는 6.25전쟁 중 동생인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었다. 백붕제의 아들이 문학평론가 백낙청이다. 백낙청의 형 백낙환이 백부인 백인제의 의업을 이어 백병원과 인제대학교(경남 김해)를 설립했다.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1977)된 백인제가옥은 2015년 1200여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의 저택으로 설정됐다.
북촌로5길 고개는 주변에 붉은 흙이 많아 홍현(紅峴)이라 불렸고, 궁중의 화초를 키우던 장원서(掌苑署)가 있어서 화개동, 줄여서 화동(花洞)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
김옥균·서재필 등 조선정부에 몰수된 개화파 관료들의 집터에 1900년 관립중학교가 설립된 이후 교명이 관립한성고등학교(1906), 경성고등보통학교(1911),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1921),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1922), 경기공립중학교(1938)로 변경돼왔다. 1976년에 경기고등학교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면서 1977년부터 정독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료관동(1927)과 도서관동·휴게실동(1938) 등은 건축 당시 철근콘크리트와 벽돌벽 구조, 스팀 난방방식을 도입한 최신식 학교건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다. 도서관1동과 2동 사이엔 이곳이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에 이름을 올린 외부대신 평재 박제순(朴齊純, 1858~1916)의 집터였음을 알려주는 우물돌이 있다.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바라보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렸던 자리가 정독도서관 정원이다. 갤 제霽, 빛 색色… 비가 그친 후 맑게 갠 하늘색 풍광을 보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의 페이크(Fake)와 부정문(不正文)을 씻어내리는 한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되어주어야 한다.
정독도서관 정문 건너편은 동아일보의 창간사옥 자리(東亞日報創刊社屋址)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1일(목) 박영효를 사장으로 타블로이드판 4면 체제로 창간되었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문맹퇴치와 한글보급을 위한 브나로드 운동, 박정희 정권 하 백지광고 참여를 불러온 불합리한 체제비판의 야당성 등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우리 사회를 뒤흔든 오보도 많이 냈다. 그중에 올해 2월,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 펴낸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보도 100선」 제2장 33편 ‘동아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가짜뉴스’(58쪽)에는 최악의 오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사건이 기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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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최악보도 100선 |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8일에 열리는 삼상회의 결과를 발표 이전에 미리 가짜뉴스로 보도했다. 사실과 정반대로 미리 보도한 것이었다. 사실은 소련이 신탁통치할 이유가 없으니 즉시 독립시키자는 것인데 반해 미국은 5년 이상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타협안으로 5년 신탁통치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에 합의된 것이었지만 동아의 이 같은 가짜뉴스로 우익진영은 즉시 독립시키자고 했다는 미국을 지지하는 ‘반탁’으로, 처음에는 역시 ‘반탁’을 지지했다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신탁통치 합의로 발표되자 ‘찬탁’의 입장으로 돌아선 좌익진영으로 나뉘어 반목 대립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즉시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반탁’을 통해 친일세력을 포함한 모든 우익진영을 단결시키려고 했다. 친일세력은 자신들의 친일경력을 즉시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애국자’로 포장했다. 오늘날 좌우대립이라는 남남갈등의 씨앗은 이렇게 뿌려진 것이었다.그러나 한민당 송진우 총무(대표)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보도를 보고 “미·영·소 삼상 결정이 세 나라에 의해 합의된 것이고 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발언했다가 다음 날 자택에서 피격 사망하고 말았다. 한민당의 수뇌도 삼상회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임시정부 수립으로 가자고 합리적 판단을 했지만, 우익 친일세력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인물은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처단하려고 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16~26)와 관련해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기사(1945.12.27)는 명백한 오보였다. 민족주의·민주주의· 문화주의를 3대 사시(社是)로 이어오고 있다는 동아일보는 이제라도 우리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오보를 인정하고 앞으로 오보를 줄일 수 있도록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
북촌로5길을 걸어 종친부(宗親府)에 다달았다. 종친부는 임금의 어보(御譜)와 어진(御眞)을 보관하고, 종실·제군의 인사와 분규를 처리하던 관청이다. 경근당·옥첩당 건물은 (구)국군기무사령부 내 테니스장을 짓기 위하여 1981년 정독도서관으로 강제 이전된 후, 2013년 원래 위치로 이전·복원됐다. 종친부(宗親府)의 본채 경근당(敬近堂)과 복도로 연결된 옥첩당(玉牒堂)의 ‘옥’자는 양쪽에 옥구슬이 있는 형상이어서 특이한데, 아스키나 엡시딕 문자로도 어떻게 표기할 방법이 없다. 종친부 옆에는 의빈(儀賓, 부마)의 인사 문제를 관장하는 의빈부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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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에 옥구슬이 있는 형상의 독특한 ‘옥’자를 쓰는 종친부(宗親府) 옥첩당(玉牒堂) 현판 |
종친부에서 율곡로로 내려가는 길의 왼편 송현동 일대가 순종의 장인 윤택영(1876~1935) 후작, 오른편 간동 일대가 윤택영의 형 윤덕영(1873~1940) 자작 형제의 해평윤씨 세거지(世居地)였다.
율곡로1길 좌측의 사간동 법륜사(法輪寺)와 두가헌(斗佳軒)은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금강산 유점사의 경성포교당으로 시작된 불이성 법륜사(不二城 法輪寺)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의 사찰이다. 1950년대 조계종은 독신을 주장하는 비구승(比丘僧, 이판승) 세력과 결혼을 허용하는 대처승(帶妻僧, 사판승) 세력으로 갈등을 겪다가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성립됐다. 그러나 중앙종회 구성에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1970년 1월 박대륜을 종정으로 하는 일파가 통합종단에서 나와 새로이 ‘한국불교태고종(太古宗)’을 발족했다. 태고종은 승려의 결혼문제를 자율에 맡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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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은 2006년 법륜사 자리에 지하 3층, 지상 4층 규모의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건물을 지었다. |
지난 10월26일(월) 언론시민단체들이 조선동아 폐간투쟁 300일을 맞아 ‘100년 언론 대역죄인 조선동아 폐간’을 다시금 촉구했다. 시민실천단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조선동아는 자신들의 영리만을 추구하는 가짜뉴스 제작판매회사이고, 회사에 충성하는 글쟁이 종업원들은 검언유착은 물론 도둑 취재도 감행하며 견제받지 않는 사악한 권력의 극단적인 횡포를 저지르고 있다.”면서 “앞으로 500일, 1000일을 향해 가는 길이 험난해도 조선동아 폐간을 위해 초심을 잊지 않고 투쟁해 가겠다.”고 선언했다.
1993년 신신애는 「세상은 요지경」을 통해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고 설파한 바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맹신은 부정의한 글(不正文)이 일용하는 양식이다.
조선일보도 호시절(好時節)이 있었다. 1920년대 조선일보 계열은 신석우, 안재홍, 이상재 등 일제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좌파 그룹이 사회주의 세력과 함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1927)하기도 했다. 민족주의 우파(타협적) 그룹의 김성수, 이광수, 최린 등 동아일보 및 일부 천도교 계열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일제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산업진흥과 교육개발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는 자치론을 주장한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탐방단은 약 3시간에 걸쳐 「조동사(朝東史)의 부정문(不正文) 만들기」를 살펴봤다. 그러나 지리적인 제약으로 동사(東史)와 관련한 몇몇 현장을 돌아보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조사(朝史)까지 더듬어보기 위해서는 광화문 거리를 지나 보신각 남쪽 청계천변까지 나가야 한다. 좋은 날을 잡아 다시 비판적 걷기에 나서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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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2일(토) 촉촉한 가을 보슬비 내리던 날, 9人의 페이크 파인더가 『기가 막힌 FAKE 뉴스』 프로젝트 2차 프로그램 「조동사(朝東史)의 부정문(不正文) 만들기」에 참가하고 있다. |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종로마을N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