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6일 화요일

망우리 사잇길 걷기

10월 2일(화) 오전에도 나홀로 트레킹… 제46차 트레킹이다.
경의중앙선 양원역 2번출구로 나와 왼편에 중랑캠핑숲을 두고 망우로 87길을 걷다가 동부제일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망우리 공원 축구장 옆에 13도 창의군탑이 있다.


창의문(彰義門)의 창의(彰義)는 의로움을 드러낸다는 뜻이고, 창의군(倡義軍)의 창의(倡義)는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은 말 그대로 대한제국 13개 도의 의병 1만여 명이 결진한 항일의병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연합 의병군이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13도 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벌여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는 표현은 바로 이곳 망우리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1991년 동아일보가 망우리공원 입구에 13도 창의군탑을 건립하였다.



사색의 길 삼거리에서 해발 282m의 망우산(忘憂山) 정상까지 올라가봤다. 망우산은 서울시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다.


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서오릉 역사문화트레킹

10월 9일 화요일 한글날 오후, 나홀로 떠나는 47차 역사문화트레킹의 탐방지는 고양시 덕양구의 서오릉이다.
3호선 홍제역 2번출구로 나와 중앙차로 버스정류장(13029)에서 702A 버스를 타고 서오릉입구(35124)에서 하차하면 고려분재연구원 뒤쪽으로 주차장과 매표소가 나온다.


명릉(明陵)은 19대 숙종(肅宗, 1661~1720)과 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의 능이다. 정자각 뒤편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며, 왼쪽 높은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으로 조성되어 전체적으로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숙종 27년(1701)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숙종이 능을 조성하면서 인현왕후 능침 오른편 자리를 비우는 허우제도를 시행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어놓았고, 숙종 45년(1720)에 숙종이 경덕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승하한 후 쌍릉의 형태가 되었다. 영조 33년(1757)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71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명릉 서쪽 언덕에 모셨다.
명릉의 향로와 어로 양 옆에는 신하들이 다니는 변로(邊路)를 낮게 깔아 놓아 전체적으로 ‘변로-향로-어로-변로’의 4개 길로 조성된 독특함이 있다.


수경원은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추존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1764)의 원이다. 숙종 27년(1701)에 입궁하여 궁녀생활을 하다가 영조 6년에 영빈(暎嬪)으로 책봉되었다. 영빈 이씨는 영조의 총애를 받아 1남(사도세자) 6녀를 두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2년 뒤인 영조 40년(1764)에 경희궁 양덕당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나자 양주 연희궁 대야동(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義烈墓)로 조성되었고, 1970년 9월 8일에 서오릉 경내로 이장됐다.
정조 12년(1788)에 묘호를 선희묘(宣禧墓)로 고쳤는데, 대한제국 선포 후인 광무 3년(1899)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자 황제의 어머니로 높이고, 지금처럼 원호를 수경원(綏慶園)이라 하였다.


익릉(翼陵)은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단릉이다. 인경왕후는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 김만중의 형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11세에 세자빈이 되었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두 공주만 낳고 20세에 천연두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익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독특하게도 경사지 지형에 맞춰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맞배지붕의 정자각(丁字閣)은 지붕이 건물 바깥으로 이어진 형태인 익랑(翼廊)이 딸려 옆 전면으로 1칸 늘어난 전면 5칸, 측면 5칸으로 세워져 서오릉 경내의 다른 정자각보다 웅장하게 보인다.


4번째 방문지는 인성대군 초장지(仁城大君 初葬地)이다. 이분(李糞, 1461~1463)은 8대 예종(睿宗)과 정비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3살 어린 나이에 풍질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어린 손자에게 효소(孝昭)라는 시호를 내리고, 인성군(仁城君)으로 추봉하였고, 9대 성종이 다시 인성대군으로 추봉하였다.
처음에는 백부 의경세자의 의묘(懿墓)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서삼릉(西三陵) 경내 왕자·왕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묘터에는 조성당시에 만든 문석인(文石人), 상석(床石), 표석(表石)이 남아 있으나, 옮겨간 서삼릉 경내 왕자·왕녀 묘역의 인성대군묘 앞에는 ‘仁城大君之墓’라 새겨진 묘비만 세워져 있다.


창릉(昌陵)은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동원이강릉으로 서오릉 영역 내에서 최초로 조성된 능이다. 세조와 문정왕후 윤씨의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은 12살 위의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병환 중인 세조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형처럼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안순왕후는 한백륜의 딸로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가 왕세자빈 지위에서 요절하고 나중에 예종이 임금이 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자각에서 볼 때 왼쪽 언덕이 예종, 오른쪽 언덕이 안순왕후의 능침이다.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귀면 형태의 나어두(羅魚頭)가 아니라 북고리로 조각되어 있다.


홍릉(弘陵)은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3세인 1704년(숙종30)에 숙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영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721년(경종1)에 영인군이 세제로 봉해짐에 따라 정성왕후도 세제빈이 되었고, 1724년에 영인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성왕후는 가장 오랫동안 중전 자리에 있었으나 결국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66세 되는 해인 1757년(영조33)에 창덕궁 관리합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부왕 숙종의 예를 따라 대행왕비의 능을 조성하면서 훗날 정성왕후와 함께 묻히기 위하여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우허제(右虛制)를 시행하여 쌍릉 형태로 만들려 하였다. 그래서 정자각에서 바라볼 때 홍릉의 왼쪽이 비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영조는 동구릉 경내의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와 쌍릉으로 모셔졌다.
참고로,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능이다.


대빈묘(大嬪墓)는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 옥산부대빈 장희빈의 묘다. 장옥정(1659~1701)은 19대 숙종대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16대 인조의 계비)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아 숙원(내명부 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의 품계였던 1688년(숙종14)에 숙종의 첫 아들 윤(경종)을 낳아 희빈에 올랐다. 왕자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는 숙종의 뜻에 서인세력이 반발하여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이 일어나 송시열 등이 유배·사사되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고 희빈을 3번째 왕비로 책봉하였다.
1694년(숙종20)에 숙빈 최씨 독살사건 등으로 갑술환국이 발생하여 서인이 정권을 되찾으면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희빈 장씨는 1701년(숙종27) 취선당에서 인현왕후를 무고하고 저주(무고의 옥)한 죄로 43세에 죽임을 당해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묻혔다가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45)에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1969년 6월 서오릉 경내로 다시 이장되었다.
아들 경종이 임금이 된 후 1722년(경종2) 왕의 사친으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되었는데, 1723년에 세운 묘표에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한편 희빈 장씨의 라이벌인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서포 김만중(1637~1692)이 <남정기(南征記)>를 통해 명나라 땅 금릉 순천부를 배경으로 유연수(숙종), 사정옥(인현왕후), 교채란(장희빈) 등을 등장시켜 풍간(諷諫)소설로 풍자한 바 있다.


서오릉의 경릉(敬陵)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동원이강릉이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 2년 후 결국 왕위에 오른 세조(수양대군)는 장남을  의경세자로 책봉하였다. 의경세자(1438~1457)는  20세에 세자 신분으로 요절하였는데,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는 얘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7대 세조 다음으로 의경세자의 동생이 8대 임금(예종)이 되었고, 예종 다음에는 의경세자의 차남인 잘산대군이 당시의 정치적 타협 속에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9대 임금(성종)이 되었다. 성종은 즉위 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어머니 소혜왕후를 인수대비로 존호를 올렸다.
일반적으로 정자각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서쪽)에 왕, 오른쪽(동쪽)에 왕비를 모시지만,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를 모셨다. 세상을 떠날 당시 덕종은 세자의 신분,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덕종의 무덤은 의묘(懿墓)로 조성되었기에 석물이 간소한데 반하여 소혜황후는 봉분을 난간석으로 두르는 등 능(陵)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참고로 동구릉에도 경릉이 있는데, 동구릉의 경릉(景陵)은 24대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를 모시고 있다.


순창원(順昌園)은 조선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장남인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 이부(李暊)와 공희빈 윤씨(恭懷嬪 尹氏, ?~1592)의 합장원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요절하여 의경세자의 경릉(敬陵)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다. 공회빈은 윤옥(尹玉)의 딸로 1562년 왕세자빈이 되었다. 이듬해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덕빈(德嬪)의 칭호를 받았고, 선조 25년(1592)에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준비하는 도중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궁궐 후원에 가매장(假埋葬) 되었는데, 이듬해 선조가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하여 빈 재궁(梓宮)이 안장되었다. 고종이 1870년에 순회묘(順懷墓)를 순창원(順昌園)으로 추숭(追崇)하였다.

서오릉(西五陵)은 이름은 서5릉이지만 능 5개소, 원 2개소, 묘 1개소, 초장지 1개소 등 모두 9군데를 탐방할 수 있다. 매표를 하고 동입서출의 원칙에 따라 명릉, 수경원, 익릉, 인성대군 초장지, 창릉, 홍릉, 대빈묘, 경릉, 순창원 순으로 돌아보면 좋다. 특히 19대 숙종 임금과 관련된 곳이 많다. 숙종과 숙종의 왕비들인 인경왕후, 인현왕후, 희빈장씨(20대 경종 생모), 인원왕후와 숙종의 며느리들인 정성왕후(21대 영조 원비), 영빈이씨(사도세자 생모)의 무덤이 모여있다. 서오릉은 경내가 넓어서 제대로 탐방하려면 최소 3시간은 소요된다.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일절(一切) vs 일체(一切)

‘일절’과 ‘일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표기는 같지만 발음과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절(一切)은 (부정의 뜻으로) 전혀, 절대로, never의 뜻이다. ‘사생활에 일절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부당한 청탁은 일절 통하지 않는다.’와 같이 사용한다.
반면 일체(一切)는 모든 것, 전부, all의 의미다. ‘재산 일체를 대학에 기부했다.’, ‘필요한 스펙은 일체 갖추었다.’와 같이 사용한다.

양귀자 작가의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에는 일절(一切)과 일체(一切)의 용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싱싱 청과물의 주인 사내는 이제 막 이사 와서 동네 형편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무작정 과일전만 벌였으면 혹시 괜찮았을 것을 눈치도 없이 ‘부식 일절 가게 안에 있음’ 이란 종이쪽지를 붙여 놓고 파, 콩나물, 두부, 상추, 양파 따위의 부식 ‘일절’이 아닌 ‘일체’를 팔기 시작하였다.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의 딱 가운데 지점에서, 그것도 결사적인 고객 확보로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두 가게 앞에 버젓이 ‘부식 일절’ 운운한 쪽지를 매달아 놓았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이처럼 한자 切은(는) 쓰임에 따라 ‘끊을 절’, 또는 ‘모두 체’로 읽는다.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크와뉴스(http://www.kwanews.com/)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