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9일 일요일

관요(官窯)에서 제작한 조선왕실 태항아리

목요일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왕실 태항아리’ 특강을 청강했다.
물론 민간에서도 태(胎)를 귀히 여겨 봉안하기는 했지만 왕조시대 왕실의 왕자와 왕녀들에 비길 수는 없을 터.
건국대 신병주 교수와 경기도자박물관 김경중 학예연구사 등의 강연 내용은 흥미로웠다.

출산 3일째에 태를 깨끗이 씻어 태옹(胎瓮)이라 칭하는 항아리에 봉안한다. 태를 넣은 이 항아리를 보다 큰 항아리에 넣었는데, 태는 결국 2개의 항아리에 보관되는 셈이다.
태항아리는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길지(吉地)에 봉안했는데 이를 안태(安胎) 또는 장태(藏胎)라 한다. 50~100m 사이의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석실을 조성하고 태항아리를 묻었는데, 이 태실(胎室)이 위치한 곳이 태봉(胎峰)이다. 태봉에는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했다.
지금도 경기도 연천군 죽면, 가평군 상면, 강원도 원주시, 경북 울진군 북면, 구미시 옥석면, 성주군 월항면, 경남 창원시 진동면, 양산시 원동면, 하동군 후천면, 부산 북구, 충남 서산시 운봉면, 금산군 추부면,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전북 익산시 삼기면, 완주군 구이면 등 ‘태봉’과 관련한 지명들이 다수 존재한다.


조선왕실에서 소용된 태항아리는 세조 13년(1467)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 분원 관요(官窯)가 설치된 후에는 분원에서 전담하여 제작하였다. 태항아리의 제작 연대는 굽 안바닥에 새겨진 명문(銘文)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백은경 학예연구사가 소개한 뚜껑 3개짜리 태항아리가 특히 흥미로웠다. 예종(세조 2남)과 성종(덕종 2남), 인성대군(예종 장남)의 태항리가 그것들이다. 성종의 경우 ‘5961’번으로 관리된 백자 외항아리는 국립민속박물관이, 별도로 제작된 뚜껑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내항아리와 태지석은 국립고궁박물관이 별도로 소장하고 있다. 임란 시 왜군에 의해 파헤쳐져 시신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선릉(宣陵)까지… 9대 임금 성종(成宗)의 수난사는 계속된다.

주로 삼남지방에 집중되어 있던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4월부터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이는 조선왕실과 백성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식민통치를 더욱 강화하려는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작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태를 묻은 태항아리는 국보급 문화재였기 때문에 상당수가 도굴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문닫는 한국방송통신대학우체국

서울 종로구 동숭동 소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우체국이 문을 닫는다.
서울지방우정청은 7월 20일(금), 광화문우체국 소속의 한국방송통신대학우체국을 오는 7월 31일(화)일 부로 폐국한다고 고시(제2018-9호)했다. 현재 우체국 입구에는 업무종료를 알리는 세움간판이 설치돼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우편수지 적자에 대한 구조조정 등의 일환으로 지난 2014년 7월 4일 광화문우체국 관할의 상명대학교우체국, 성균관대학교우체국을 폐국한 바 있다. 두 대학의 우체국은 현재 우편취급국으로 축소, 운영되고 있다.


한국방송통신대학 우체국은 방송통신대학 역사기록관과 더불어 구 공업전습소 본관(사적 제279호) 건물에 입주해 있다.
대한제국은 상공업 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염직, 직조, 제지, 금은세공, 목공 등의 근대기술을 교육하기 위하여 탁지부 건축소에서 설계하고, 일본인 요시다겐조오(吉田謙造)가 시공을 맡아 1907년에 착공, 1908년에 공업전습소를 준공하였다.
그러나 1912년 총독부가 건물을 헐고 중앙시험소를 지었는데, 이후 중앙시험소 청사를 공업전습소가 사용하게 되었다. 문화재 명칭은 ‘공업전습소’지만 어찌보면 ‘중앙시험소’로 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 H자형의 2층 회백색 건물은 현존하는 대한제국기의 유일한 목조건물이다.

2018년 7월 17일 화요일

칠월 열이렛날의 사연

1948년 미군정의 관리 하에 실시된 남한만의 5·10 총선거(월)를 통해 국회의원 200명이 당선되었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는 같은 달 5월 31일(월) 개원하여 초대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원 의원을 선출하였다. 제헌의회는 1948년 7월 1일(목)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의결하였다.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의 현민(玄民) 유진오(1906~1987)는 임정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기초로 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 정신을 더하여 바이마르 헌법 등을 참고해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초안을 만들어냈다.

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된 유진오의 초안은 본회의 이틀 전인 6월 21일(월) 국회의장 이승만의 “이 헌법 하에서는 민간에 남겠다.”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이승만의 요구대로 대통령제와 단원제 국회로 수정된 변경안은 7월 12일(월)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헌법 제정에 착수한 지 약 40여일 만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첫 헌법은 닷새 뒤인 17일(토)에야 공포되는데, 이는 556년 전 이성계의 즉위와 관련됐다는 설이 있다.

1392년 7월 16일 시중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이제·이지란·남재·조영규·조영무 등 대소신료, 한량(閑良)·기로(耆老)와 함께 국새를 들고 막후 통치자 이성계의 사저를 찾아 왕위에 오르기를 청하였다. 이성계는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이튿날 마침내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恭讓王)으로부터 양위(讓位)를 받아 고려국(高麗國) 35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새로운 나라의 법통을 다지고 싶었던 정치인들이 7월 17일에 주목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1895년 을미개혁 이전의 모든 한국사 기록은 음력이다. 고종은 1895년 을미년 11월 16일을 음력의 마지막날로 하여 다음날인 11월 17일을 1896년 양력 1월 1일 건양 원년으로 선포했다. 결국 실질적으로 조선의 건국일이 되는 1392년 7월 17일은 양력으로 따지면 8월 5일인 것이다.

제헌절은 5대 국경일 중 하나지만, 4대 국경일(삼일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과 달리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국가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헌법을 만든 날인 만큼 태극기는 게양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크와뉴스(http://www.kwa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2018년 7월 9일 월요일

부담스러운 쿠션 언어

우리말의 주체 높임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주격조사 ‘-이, -가’ 대신 ‘-께서’를 붙이고 용언의 어간에 주체높임 선어말어미 ‘-(으)시-’를 결합해야 한다.

“저희 가게에는 다양한 화장품이 있으십니다.”
“이 화장품은 얼마예요?”
“네, 1만원이세요.”

매장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대화이다. ‘있으십니다’란 높임 표현의 주체는 화장품인데, 무생물인 화장품은 높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법에 맞지 않을뿐더러 듣기에도 거북하다. 각각 ‘(화장품이) 있습니다’, ‘(1만원)입니다’로 고쳐야 한다.
서비스업계 직원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른바 ‘쿠션 언어’는 고객 갑질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형용사 ‘있다’의 주체 높임 표현은 ‘-(으)시-’가 붙은 ‘있으시다’와 특수어휘 ‘계시다’의 2가지가 있다.
화자가 주어를 직접 높일 경우에는 ‘교장 선생님께서 교무실에 계신다.’와 같이 ‘계시다’를 쓴다. 반면에 주어와 관련된 대상(신체, 소유물, 생각)을 통하여 주어를 간접적으로 높일 때는 ‘교장 선생님께서는 걱정거리가 있으시다.’와 같이 ‘있으시다’를 쓴다. ‘-(으)시-’가 쓰인 ‘있으시다’가 높이는 것은 안긴문장의 주어인 ‘걱정거리’가 아니라 안은문장의 주어인 ‘교장 선생님’이다.
‘지금부터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주체와 관련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높이고 있으므로 주어를 직접 높일 때 사용하는 ‘계시다’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있으시겠습니다’로 고쳐야 한다.
요컨대 간접 높임의 경우에는 서술어에서 ‘계시다, 편찮으시다’와 같은 특수 어휘를 쓰지 않고 ‘-(으)시-’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크와뉴스(http://kwanews.com)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