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申時(오후3시~5시) 경에 진접 광릉숲 자락의 봉선사에 다녀왔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산 기슭에 운악사로 창건하였다.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광릉 원찰로 삼아 초창하면서 봉선사(奉先寺) 이름을 받게 됐다. 중종의 2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던 명종 6년(1551)에 보우대사는 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만들었다. 6·25전쟁 중에 삼성각 정도를 제외한 16개동 150간의 가람이 전소되었고, 이후 60년 넘게 복원과 신축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과 갑찰로 불리는만큼 일주문의 다포가 화려하다.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봉선사를 초창할 때 절 입구에 심은 한 그루 느티나무가 아직 건재하다. 수고 21m, 나무둘레 5m, 수령은 550년에 이른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깃발을 세우는 기둥으로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기(幢)를 걸어 외부에 알리는 구실을 하였다. 봉선사 당간지주는 예종 1년(1469) 초창 때 세워진 것으로 명종 6년(1551) 승과고시 부활과 더불어 전국 승려들이 모여 승과평(僧科坪)에서 시험을 치를 때 승과기(僧科旗)를 높이 달아 두었다고 한다. 1매의 대석을 깎아내어 양쪽 기둥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제작기법이 뛰어나고 보기 드문 형태이다. 기둥높이 148㎝, 기둥너비 34㎝, 기둥사이 40㎝, 전체너비 108㎝, 두께 100㎝로 웅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범종루 2층에는 아침과 저녁 예불 때 치는 4가지 불구(佛具), 즉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불전사물(佛殿四物)이 걸려 있다. 그런데 진짜 눈여겨봐야 할 것은 1층의 동종이다.
봉선사동종(奉先寺銅鐘)은 예종 원년(1469)에 선왕인 세조대왕의 치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총 높이 229.4㎝, 입지름 156㎝의 대형 청동범종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돼있다.
종의 고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머리를 서로 역방향으로 향하는 일체쌍두(一體雙頭)의 용뉴(龍鈕)를 형성하였으며, 중심 정상부에는 용의 발톱으로 여의보주를 소중히 받든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는 상부로부터 연판, 연곽, 보살상, 범자, 하대장식이 배치되었으며, 상대와 당좌는 생략되었다. 천판은 반구형으로 조형되었으며, 주연(周緣)에는 넓은 단엽복판연화문(單葉複瓣蓮花紋)을 돌려 장식하였다. 그 밑에는 2조의 융기된 선각(線刻)을 돌려서 종신(鍾身)과 구분을 이루었다. 종신 중복(中腹)에는 융기된 3조의 횡대를 돌려 몸체를 상하로 구분하였다. 사방의 연곽대에는 섬세한 당초문이 장식되었고, 그 안에는 반구형으로 돌출된 8엽화문이 모두 9개씩 정열된 모습이다. 보살상은 얕은 선각부조로 조형되었는데 상호, 의습, 영락 등의 묘사가 매우 섬려하다. 하대에는 나선형의 거친 파도문이 정려하게 장식되었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은 15세기 후반에 왕실의 발원으로 관장(官匠)에 의하여 제작된 대형 범종이다. 용뉴 조각이나 각부 장식의 조형 상태가 우수하고 종신의 연곽과 보살상, 하대문양 등 부분적으로 한국종의 문양요소가 반영된 조선전기의 모범적인 조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큰법당’은 1970년 운허(1892~1980) 스님이 옛 대웅전을 복원하면서 새로 붙인 이름인데, 큰법당은 편액뿐 아니라 기둥글(柱聯)도 한글이다.
보물 제1792호인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毘盧遮那三身掛佛圖)가 큰법당 안 괘불함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괘불도의 아래쪽 화기를 통해 제작연도, 시주자, 화사의 이름을 알 수 있는데… 영조 11년(1735)에 봉안되었고, 시주자는 상궁 이성애로 정조의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것이고, 화사는 임응 스님을 팀장으로 학총 등 4명의 도화서 화원이다.
조사전(祖師殿)은 원래는 봉선사를 초창하여 개산(開山)한 개산대공덕주 정희왕후 윤씨와, 중건공덕주인 계민선사와 정문수행을 모시기 위한 당우(堂宇)인 개건당(開建堂)이었다. 1977년 월운 주지가 그 오른편에 새로 개건당을 지어 개산(開山)과 중건(重建)의 공덕주들을 모시고, 원래의 개건당은 조사전으로 장엄하여 계민선사 등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삼성각(三聖閣)은 1926년 월초화상이 독성각(獨聖閣), 북두각(北斗閣), 산령각(山靈閣)으로 건립하였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라고 한다.
광복 후 몰아친 친일청산의 폭풍을 피해 향산광랑(香山光郞) 이광수가 이곳 봉선사 요사채(寮舍) 어딘가에서 1년 간 은둔하였다고 한다. 삼성각 왼편은 가장 고즈넉해 보이는 공간이어서 담아봤다. 수많은 작은 돌탑이 기와마다 3층 이상으로 올려져 있다.
봉선사 경내 주차장 연못에 서식하는 붉은귀거북… 원래 미시시피 강변에 살아야 할 외래종 별주부가 상대적으로 싼 가격 때문에 애완용으로 많이 수입되었고, 사찰의 방생(放生)법회 등을 통해 퍼져 나가 고유종 남생이를 밀어내고 우리 생태계에 적응한 사례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불살생계라는 선한 의도가 생태계 교란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방향을 바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을 고민해보면 어떨까 싶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산 기슭에 운악사로 창건하였다.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광릉 원찰로 삼아 초창하면서 봉선사(奉先寺) 이름을 받게 됐다. 중종의 2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던 명종 6년(1551)에 보우대사는 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만들었다. 6·25전쟁 중에 삼성각 정도를 제외한 16개동 150간의 가람이 전소되었고, 이후 60년 넘게 복원과 신축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과 갑찰로 불리는만큼 일주문의 다포가 화려하다.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봉선사를 초창할 때 절 입구에 심은 한 그루 느티나무가 아직 건재하다. 수고 21m, 나무둘레 5m, 수령은 550년에 이른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깃발을 세우는 기둥으로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기(幢)를 걸어 외부에 알리는 구실을 하였다. 봉선사 당간지주는 예종 1년(1469) 초창 때 세워진 것으로 명종 6년(1551) 승과고시 부활과 더불어 전국 승려들이 모여 승과평(僧科坪)에서 시험을 치를 때 승과기(僧科旗)를 높이 달아 두었다고 한다. 1매의 대석을 깎아내어 양쪽 기둥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제작기법이 뛰어나고 보기 드문 형태이다. 기둥높이 148㎝, 기둥너비 34㎝, 기둥사이 40㎝, 전체너비 108㎝, 두께 100㎝로 웅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범종루 2층에는 아침과 저녁 예불 때 치는 4가지 불구(佛具), 즉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불전사물(佛殿四物)이 걸려 있다. 그런데 진짜 눈여겨봐야 할 것은 1층의 동종이다.
봉선사동종(奉先寺銅鐘)은 예종 원년(1469)에 선왕인 세조대왕의 치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총 높이 229.4㎝, 입지름 156㎝의 대형 청동범종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돼있다.
종의 고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머리를 서로 역방향으로 향하는 일체쌍두(一體雙頭)의 용뉴(龍鈕)를 형성하였으며, 중심 정상부에는 용의 발톱으로 여의보주를 소중히 받든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는 상부로부터 연판, 연곽, 보살상, 범자, 하대장식이 배치되었으며, 상대와 당좌는 생략되었다. 천판은 반구형으로 조형되었으며, 주연(周緣)에는 넓은 단엽복판연화문(單葉複瓣蓮花紋)을 돌려 장식하였다. 그 밑에는 2조의 융기된 선각(線刻)을 돌려서 종신(鍾身)과 구분을 이루었다. 종신 중복(中腹)에는 융기된 3조의 횡대를 돌려 몸체를 상하로 구분하였다. 사방의 연곽대에는 섬세한 당초문이 장식되었고, 그 안에는 반구형으로 돌출된 8엽화문이 모두 9개씩 정열된 모습이다. 보살상은 얕은 선각부조로 조형되었는데 상호, 의습, 영락 등의 묘사가 매우 섬려하다. 하대에는 나선형의 거친 파도문이 정려하게 장식되었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은 15세기 후반에 왕실의 발원으로 관장(官匠)에 의하여 제작된 대형 범종이다. 용뉴 조각이나 각부 장식의 조형 상태가 우수하고 종신의 연곽과 보살상, 하대문양 등 부분적으로 한국종의 문양요소가 반영된 조선전기의 모범적인 조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큰법당’은 1970년 운허(1892~1980) 스님이 옛 대웅전을 복원하면서 새로 붙인 이름인데, 큰법당은 편액뿐 아니라 기둥글(柱聯)도 한글이다.
보물 제1792호인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毘盧遮那三身掛佛圖)가 큰법당 안 괘불함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괘불도의 아래쪽 화기를 통해 제작연도, 시주자, 화사의 이름을 알 수 있는데… 영조 11년(1735)에 봉안되었고, 시주자는 상궁 이성애로 정조의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것이고, 화사는 임응 스님을 팀장으로 학총 등 4명의 도화서 화원이다.
조사전(祖師殿)은 원래는 봉선사를 초창하여 개산(開山)한 개산대공덕주 정희왕후 윤씨와, 중건공덕주인 계민선사와 정문수행을 모시기 위한 당우(堂宇)인 개건당(開建堂)이었다. 1977년 월운 주지가 그 오른편에 새로 개건당을 지어 개산(開山)과 중건(重建)의 공덕주들을 모시고, 원래의 개건당은 조사전으로 장엄하여 계민선사 등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삼성각(三聖閣)은 1926년 월초화상이 독성각(獨聖閣), 북두각(北斗閣), 산령각(山靈閣)으로 건립하였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라고 한다.
광복 후 몰아친 친일청산의 폭풍을 피해 향산광랑(香山光郞) 이광수가 이곳 봉선사 요사채(寮舍) 어딘가에서 1년 간 은둔하였다고 한다. 삼성각 왼편은 가장 고즈넉해 보이는 공간이어서 담아봤다. 수많은 작은 돌탑이 기와마다 3층 이상으로 올려져 있다.
봉선사 경내 주차장 연못에 서식하는 붉은귀거북… 원래 미시시피 강변에 살아야 할 외래종 별주부가 상대적으로 싼 가격 때문에 애완용으로 많이 수입되었고, 사찰의 방생(放生)법회 등을 통해 퍼져 나가 고유종 남생이를 밀어내고 우리 생태계에 적응한 사례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불살생계라는 선한 의도가 생태계 교란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방향을 바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을 고민해보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