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8일 토요일

황성옛터 만월대

918년 6월 15일(음력) 궁예를 축출하고 철원 포정전(布政殿)에서 제왕의 자리에 오른 왕건은 옛 고구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정하였다. 이듬해인 919년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송악산 남쪽 기슭에 정궁 만월대(滿月臺)를 창건하였다.
궁 안에 있던 여러 대(臺) 가운데 하나였던 만월대는 후에 궁궐 전체를 가리키게 됐다.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2차 침입, 1126년(인종 4년) 이자겸 및 척준경의 난, 1171년(명종 1년) 화재, 1225년(고종 12년)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해오다가 1362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의 난으로 현재는 돌계단과 주춧돌만 남아있다.


2016년 북한의 핵실험으로 중단되기까지 2007년부터 남북 학자들이 7차례에 걸쳐 공동발굴한 개성만월대 터와 유물을 고려 건국 1100년을 기념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지난 2월 평창 전시를 이은 순회 전시 성격이다.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수막새와 그릇 등의 유물을 3D 프린팅으로 출력해놓았다. 정면9칸, 측면4칸의 맞배지붕으로 추정되는 정전 회경전(會慶殿)의 웅장한 모습은 3차원 홀로그램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은 18세기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1713~1791)이 1757년(영조 33년) 개성유수 오수채의 초청으로 송도를 유람할 때 선물로 그려주어 해주오씨 집안에서 전해져 왔던 화첩이다.
유람 순으로 그려나간 화첩의 첫 그림은 <송도전경>이다. 하단에 남대문을 두고 그 뒤로 쭉뻗은 대로 좌우로 초가집이 늘어서고 그 뒤에 기와집이 들어서있는 초점투시법 구도로 현장감을 살렸다. 중·상단부에 자리한 것은 물론 송악산이다.


고려의 유신 원천석이 나라의 흥망에 따른 무상감을 시각적·청각적으로 형상화한 ‘회고가’가 떠오른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ㅣ로다 / 오백 년 왕업이 목적(木笛)에 부쳐시니 /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1928년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황성옛터>(荒城의 跡)는 조선총독부의 금지에도 5만장이 팔려나간 히트곡이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4월 27일 어제 남북의 정상이 두 손을 꼭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남북간 학술교류도 3년 만에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고도(古都) 개성에 돌아들어 만월대 터를 둘러볼 날이 올 수 있기를…

2018년 4월 20일 금요일

마주 잡은 두 손, 업데이트

지역의 D고등학교 국어 시험엔 ‘교과서 밖 소설’이 지문으로 출제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학생들의 금전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전에 프린트물로 배포된다. 이번 중간고사에서는 김창규의 <업데이트>라는 SF 소설이 그 대상이다. 학교 시험으로는 장르도 생소하고 작가도 금시초문이다. 이력을 살펴보니 작가는 미국 태생으로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Neuromancer)>를 번역(황금가지 판)했다고 하기에 책꽂이를 뒤져봤는데, 내 것은 노희경 씨가 옮긴 열음사 판이다.
국립과천과학관이 2014년 주최한 제1회 SF어워드에 ‘업데이트’로 응모하여 단편 부문 대상을, 2회 때는 ‘뇌수’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2016년 3회 SF어워드에서도 단편 대상을 수상했는데 그 수상작인 ‘우리가 추방된 세계’를 제목으로 2016년에 동명의 단편집을 출간했다. 10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 ‘업데이트’도 들어있다.
‘업데이트’는 가난한 선천성 시각장애자 최인유를 주인공으로 하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SF 단편이다. 소설은 4년 전에 어렵사리 시술(눈-704)을 받아 시력을 갖게 된 인유가 특허권을 다투는 두 기업체 사이의 분쟁과 이를 해당 기술의 소프트웨어 삭제로 결론 내버린 의료공단의 무책임한 탁상행정으로 결국 시력을 잃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가처분소득을 모두 털어 당국에서 금지한 불법 시술로 남친 현종과의 4년 동안의 추억 중 단지 몇 장면만을 언어저장소에 소중히 간직하는 결말 부분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어렵지 않게 상상하게 만든다.
현진건이 그려낸 1920년대 김 첨지의 ‘운수 좋은 날’이 실상은 가장 운수 없는 비통한 날이었듯, 인유의 기억 ‘업데이트’는 사실 ‘다운데이트’였던 셈이다. 김창규 작가는 반어적 제목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비극성을 심화하려는 의도였을까. 생윤 과목의 해당 단원과 연계하면 충분히 좋은 사유거리가 될 법하다.


작년엔 이기호의 ‘마주 잡은 두 손’이 소설 지문으로 출제됐었다. 단편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에 포함된 40편의 콩트 중 하나로, 이제 막 첫 책을 펴낸 신출내기 작가가 자신의 책을 훔치려는 가난한 20살 여대생의 손을 나꿔채 대형서점 밖으로 도망쳐나가는 이야기이다.
소녀시대 태연을 험담하는 한 중딩의 멱살을 잡았다가 경찰서로 소환된 53세 검도장 사범, 이 사생팬 에피소드의 제목은 감성을 자극하는 ‘벚꽃 흩날리는 이유’이다. 16년을 함께 살아온 몰티즈 봉순이가 노령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충성심을 보여주는 이야기(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는 우리 뚜비를 생각케 했다. 죽은 봉순이를 어머니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아버지 산소 옆에 묻기 위해 언 땅에 삽질하는 어두운 마음이 그대로 읽혀졌다. 한편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에게 고등어값 흥정으로 덤터기 씌우려는 고등어 장수 이야기(미드나잇 하이웨이)와 반포보은을 연상케 하는 ‘불 켜지는 순간들’도 의미있게 다가왔다.
4년 전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120표의 저조한 득표로 낙선하고 선거비용 때문에 살던 아파트와 운영하던 갈비집을 잃게 된 친구 박진만에게 이번 선거엔 출마하지 말기를 당부하는 편지형식의 이야기(출마하는 친구에게)는 다가오는 6·13지방선거를 통해 위정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요사이 남양주 다산신도시 아파트의 택배 갑질이 사회문제로 불거져 온 국민들의 합당한 비난이 몰아치고 있는데, ‘아파트마트 셰르파’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시사점을 준다. “이게 왜…… 이런 일들이 생긴 거죠?”라는 치킨집 배달 아르바이터인 주인공의 물음에 치킨을 주문한 불혹의 남자는 “글쎄요.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라고 되묻는다. 다산신도시 해당 아파트 주민들은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전체적으로 길고 복잡하게 얽힌 내용을 꺼려하는 독서 흐름에 깔맞춤한 면이 보인다. 작가가 할 얘기만 아주 짧게 하는 트렌디한 책으로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가 유난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