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4일 토요일

용산 답사

오전 10시, 숭례문 앞에서 시작하여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후암동을 거쳐 경리단길을 탐방했다.


조선통신사는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까지 조선 국왕이 일본 막부 쇼군에게 보낸 12차례의 외교사절을 일컫는다. 국내노정만 해도 한양 숭례문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약 20일 동안 440㎞ 거리를 가야하는 대장정이었다.
사진은 숭례문관리소 인근에서 확인한 ‘조선통신사의 길’ 표석이다.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에서 필립스코리아 T타워쪽을 조망하면 힐튼호텔과 CJ빌딩 사이에 공터가 보이는데, 이곳이 서울 최초의 관우 사당인 남묘(南廟)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국립현충원 사당동 인근으로 옮겨가 있다.


브라운스톤 남산아파트는 옛 특경대(1953), 옛 국방부(1953), 옛 병무청(1970) 자리였다고 한다.


후암시장 안쪽에 낡았지만 특이한 주택이 있어 앵글에 담아봤다. 일본식과 서양식이 혼재된 양식으로 보인다.


후암동 396번지는 의열단원 김상옥(1890.1.5~1923.1.22)의 매부 고봉근이 살던 곳이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으로 타격을 입은 일경은 5일 후 金相玉의 은신처를 추적하여 포위망을 좁혀왔다. 김상옥이 쌍권총을 들고 반격하여 일본 순사를 사살한 곳이 후암동 304번지이다. 그는 눈 덮인 남산 줄기를 타고 왕십리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이후 효제동에 이르러 3시간 넘게 총격전을 벌이던 중 탄환이 떨어지자 자결, 순국하였다.


아동양육시설인 영락보린원(후암로4길 70)이 들어선 자리는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있었기에 조선시대에 전생서가 설치되어 국가제사용 가축을 길렀다. 영락보린원 입구에 전생서터(典牲暑址) 표석이 세워졌다.


후암로16가길은 옛 조선은행 사택지였다. 현재는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후암생활관으로 쓰이고 있다.


1919년 4월 1일 후암동 190번지 일대에 용산 인근의 일본거류민 자제를 위한 경성삼판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됐다. 해방 후인 1946년 4월 1일엔 삼판(三板)을 삼광(三光)으로 개칭하였다. 답사일 현재 운동장 등이 한창 공사중이었는데, 후문 쪽 진입로엔 특이하게도 현대문구, 삼광문구 2개의 문방구가 건재하다.
삼광초등학교 정문길을 사이에 두고 1920년 4월 경성공립고등여학교의 분교가 설치되었는데 1923년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로 전환되어 일본인 중등교육을 담당하다가 해방 후인 1946년에 수도여자중학교로 개칭되었다. 1951년에 수도여고·수도여중으로 분리된 후 2000년에 신대방동으로 이전하여 비어 있던 자리에 2008년 서울교육청 시설관리사업본부가 들어왔다. 삼광초와 수도여고 인근은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추정되는 일본식 주택이 더러 보인다.


용산고 정문 앞의 이태원 터(梨泰院址) 표석은 그 위치가 잘못됐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1906년 용산에 주둔하고 경성위수병원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태원 주변의 마을 사람들을 보광동 등으로 강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맞다면 최소 1㎞ 정도 격차가 있게 된다.


1918년 4월 개교한 용산중학교는 경성중학교와 더불어 서울지역의 일본인 남학교였다가 일제 패망 후 한국인 학교로 재탄생하였다.


용산고 맞은편 호달짬뽕집 인근(萬樹園 터?)에 있는 주자창은 지붕이 특이하여 앵글에 담아봤다.


우리은행 후암동지점 앞 삼거리 비탈길을 올라가는 돌계단은 그 위쪽의 해방촌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유명하다. 108하늘계단으로 불리는 이 계단은 일제 말기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로 향하는 표참도(表参道)인데, 현재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 위해 한창 공사중이다. 주민 편익은 상승하겠지만 그로 인해 역사는 깨어진다.







2018년 3월 15일 목요일

국수와 봄나물

퇴근 후 들어와 TV를 켰더니 수요미식회 케이블 재방에서 세계의 ‘국수’를 주제로 얘기들을 하네.
요즘 입맛도 없고, 오늘은 반가운 봄비도 오시고 뜨끈한 잔치국수가 땡기는 밤…
며칠전 카톡 지인이 올려준 멸치국수, 쑥전, 냉이초무침 사진으로 야간식이증후군을 잠재운다.



역시 카톡방에서 얻어온 사진인데, 요놈은 괴불주머니(똥풀이)라고 하는 두해살이풀이란다. 얼핏 보면 쑥으로 보이는데 털이 없다. 반면에 독 성분이 있다니 나물로 오인하면 안 된다고 한다.


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인왕산과 수성동계곡

제40차 역사문화트레킹은 제14차 야행을 겸한 일정이었다.
인왕산으로 올라가기 위해 3호선 독립문역으로 갔다. 독립문역사 지하공간 벽면엔 흔히 접할 수 없는 이런저런 문양의 태극기가 전시돼 있었다.
얼마전 사상 처음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거행된 제99주년 3·1절 기념식에는 독립운동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 6종이 휘날렸었는데… 그날 도열했던 태극기가 독립문역 지하공간에도 있을 듯하여 기록해 둔다.


1. 독립운동가 남상락의 자수 태극기(1919년)
-1919년 충남 당진 4·4만세 운동 당시 사용
-가로 44㎝ 세로 34㎝
-남상락 선생의 부인께서 흰 명주 천 홍·청·검정 실로 수 놓아 손바느질로 제작

2. 진관사 소장 태극기(1919년 추정)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제정 국기 양식과 동일하나 현재 국기와 비교해 4괘의 ‘리’와 ‘감’의 위치 변경돼 있음

3.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1923년)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걸렸던 태극기
-가로 189㎝ 세로 142㎝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종준 부부, 태극과 4괘 천을 오려 꿰매 제작

4.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1942년)
-한국 독립 만찬 파티 때 사용된 태극기
-1981년 재미동포가 방문해 입수·보관하다 국회 기증

5. 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1941년)
-김구 선생, 벨기에 출신 신부에게 전달한 태극기
-한 쪽에는 ‘광복군 지원을 당부’하는 내용 기록
“이번 행차에 어느 곳에서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전해주시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 인력, 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서 강로말세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고”

6. 한국광복군 서명 태극기(1945년)
-한국광복군 문웅명, 동료 이정수에게 받은 태극기
-문웅명, 다른 부대로 전출되자 이를 아쉬워한 동료들이 여백에 서명




이곳은 인왕산 정상(338m)지만, 인왕봉(仁王峰)이라 부르지 않는다. 인왕봉(人王峰 1140m)은 천왕봉(天王峰 1187m), 지왕봉(地王峰 1120m)과 함께 무등산(無等山)의 대표적인 봉우리 이름이다.



2018년 3월 4일 일요일

경운동 건국빌딩

어제 종로3가역 인근 건국빌딩에서 공덕역 근처 풍림빌딩으로 사무실을 이전하는 ‘아는 형님’(?)이 계셔서 이사짐을 좀 거들어드렸다.
건국빌딩은 가운데에 주차장을 ㄱ자로 둘러싸고 인사관, 경운관, 건국관의 3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어 번 가봤는데도 건물이 헷갈린다. 인사관(삼일대로 437)은 낙원동이고, 경운관(삼일대로 443)과 건국관(인사동4길)은 경운동이다. 건물 내부 복도가 널찍널찍하다.
월산대군의 옛 사저에 300년 터울을 두고 의주 몽진에서 환도한 선조와 아관파천에서 환궁한 고종이 기거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동이란 동명이 경운궁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건국빌딩에서 경운궁(덕수궁)까지는 직선 거리로 1.4㎞에 이른다.
건국빌딩 자리는 1910년까지 서북학회 등이 들어섰던 곳이라고 한다.


낙원동 네거리의 낙원떡집(낙원본점) 앞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삼일대로를 건너 직진하면 건국빌딩 인사관(구 건국 1호 빌딩)과 건국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
횡단보도 중간 지점에는 한양 조씨 정암 조광조(1482~1520)가 살던 한양골 집터 표석이 있다. 고려시대에 한양향교가 있던 자리여서 향교동 또는 한양골로 불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운관(구 건국 2호 빌딩) 도로쪽 입구 앞에는 표석 하나가 놓여있다. 오성학교, 보성학교, 정치대학의 이름이 보인다.

<표지석>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Former Site of Seobukhakhoe)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하여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 조직한 애국 계몽 단체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10년에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한때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정치대학이 자리하였다.

1908년 1월에 기존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하여 창설된 단체가 서북학회다. 평안도·황해도·함경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심이었다고 하는데 박은식, 이갑, 이동휘, 안창호 등 스쿼드가 대단하다. 이들은 1908년 11월 2일에 33명의 공동명의로 낙원동 282번지에 건물을 준공했다. 1910년 10월 1일 경술국치 후 서북학회가 강제해산된 후에는 서북협성학교, 오성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해체된 건물은 1984년 12월에 광진구 모진동 건국대학교 내로 이전, 복원되어 현재 건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건국관(구 건국 3호 빌딩) 좌우에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서 있는 사이로 다양한 석물들이 놓여 있다. 건국관 입주 업체에서 판매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건국관에는 고미술이나 서예 관련 상호가 많이 보인다.


2018년 3월 1일 목요일

가회동, 종로 도심 트레킹

제99주년 삼일절을 맞아 가회동과 종로 일대 일부를 돌아보았다. 제39차 역사문화트레킹이다. 기록은 주요 포스트의 안내판과 표지석의 내용으로 대신한다.


<안내판> 3·1운동 유적지 : 유심사 터(惟心社址)
3·1운동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가 있던 곳. 만해 한용운(1879~1944)이 이곳에서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를 주도하였다.


<안내판> 석정보름우물(石井十五井, Seokjeong Full Moon Well)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우물은 주된 음수, 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었던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데다,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궁궐 궁녀들이 몰래 떠다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안내판> 3·1운동 책원비(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Memorial)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소재지: 종로구 창덕궁길 164(중앙고등학교 교정)
규모: 높이 2.5m, 폭 2.1m
1919년 중앙고등학교 교장이던 송진우, 김성수 그리고 교사이던 현상윤 등이 모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 작성 등 3·1운동 계획을 세우던 곳이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이었기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가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책원비를 건립하였다.

[비문 내용]
1910년 8월 29일 우니라나는 포악무도한 왜적으로부터 그 유례가 없는 굴욕적인 침략을 받아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민족의 자유는 여지없이 박탈당하여 삼천리 강산은 흡사히 감옥으로 변하고 2천만 동포는 누구나 포로가 되는 고초를 겪었으며, 이런 무리한 탄압은 날로 심하여 우리는 거의 질식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에 종결되고 만국평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미국 대통령 윌슨씨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민족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가 결정지을 것이라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하 생략


<안내판> 중앙고보 숙직실 터(The Site of a Night Duty Room at Choongang-gobo)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일본에서 추진하던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을 국내에 알려, 3·1운동을 촉발시킨 곳이다.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1919년 1월 중앙고보를 방문하여 숙직실에서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와 만나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을 촉진하였다.
중앙고보 숙직실은 1917년 김성수가 계동 교사를 지으면서 교장 사택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현재의 강단 정문 앞에 있던 당시 숙직실은 강당을 지으면서 철거하고 1973년 ‘3·1기념관’으로 복원하였다.


<안내판> 3·1기념관(3·1紀念館)
중앙학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3·1운동이다.
당시 중앙학교의 교사와 숙직실은 우국인사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건물이 당시 중앙학교의 숙직실이었고 여기에서 인촌 김성수를 비롯 고하 송진우, 기당 현상윤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 3·1운동을 모의했다.
구체적인 거사 계획은 인촌, 고하, 기당 세사람이 이곳에서 처음 발의했고 인촌을 배후에 두고 49인이 거사를 주도했으며 이들 중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낭독했다.
중앙학교는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1973년 당시 숙직실을 복원 3·1기념관을 설치하고 3·1운동 책원지비를 세운다.



위 사진은 가회동 북촌로 돈미약국 인근의 한옥 처마를 촬영한 것이다. 이 동네 한옥엔 함석 차양이 많이 보인다.


<표지석> 손병희선생집터(孫秉熙先生家址, House of Son Byeonghui)
손병희(1861~1922) 선생은 구한말의 천도교(天道敎) 지도자이자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에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표지석>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Original site of the Joseon Language Society)
조선어학회는 1921년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아래 사진은 덕성여중과 덕성여고를 잇는 다리를 촬영한 것이다. 덕성여중 담장쪽에 천도교중앙총부지 표석이 있다.


<안내판>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The Headquarters of Chondogyo)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소재지: 종로구 율곡로3길 49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3·1운동 계획을 논의한 옛 천도교 중앙총부가 있던 곳이다.
천도교에서는 손병희의 지도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 인쇄 배포와 만세 시위를 통해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불교계와 제휴를 추진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계의 3·1운동 통합 논의에서 중심이 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천도교 중앙총부 본관 건물은 1910년 2층으로 건립되었고, 1921년 경운동 신축 교당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옛 건물은 사라지고 덕성여자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표지석> 삼일독립선언유적지
이 집터는 본래 중종때 순화공주의 궁터라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삼일독립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 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히 사로잡혔다. 그 뒤 남감리 교회는 이 터를 매수하여 태화기독교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 되었으나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건물이 헐리게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줄잡아 둔다."

                                                            건립일 1997년 3월 1일
                                                            당초 건립 1982년 8월 15일

                                                            오리 전택부 글
                                                            해청 손경식 글씨




<안내판>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THE SIGNING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기미년(1919년) 3월 1일, 이곳(당시 명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 선언식을 통해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2년 후인 1921년, 감리교 여성 선교사는 이곳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선도적인 복지 사업을 펼치며 하나님의 큰 평화를 실현하고자 ‘태화여자관’의 문을 열었다. 태화복지재단은 이처럼 유서 깊은 장소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독립 선언 장면을 기록화로 제작하였다.


<표지석> 순화궁터(順和宮址)
조선조 헌종(憲宗)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 金氏, 金祖根의 딸) 사당인 순화궁(順和宮)이 있었던 자리



<표지석> 이율곡(李栗谷)선생 살던 집터
이 언저리는 이이(李珥) 이율곡(1536~1584) 선생이 살던 절골 집터

승동교회 내 이율곡의 집터 표석… ‘율곡 이이’가 아니라 ‘이이 이율곡’이라니… 표기가 요상하다. 아마도 글자 배치 때문이겠지만, 생경한 느낌이 든다. 최소한의 통일된 형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안내판> 승동교회(胜勝洞敎會|勝洞敎會, Seung Dong Presbyterian Church)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0호 / 시대: 1912년
소재지: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
이 건물은 1893년 미국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한 승동교회의 교회당으로 19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 주는 벽돌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책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의 학생대표들이 이 교회에 모여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 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승동교회는 한국 교회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행사가 이곳에서 많이 열렸다. 수리와 증축이 거듭되면서 건물의 외벽에 구조적 결함이 생겨, 외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철골로 보강하여 안전하게 복원하였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안내판> 승동교화와 三·一운동
승동교회 면려청년회장이었던 김원벽(金元璧)을 비롯해서 학생지도자들은 1919년 2월 20일에 승동교회 1층 밀실에서 三·一학생 독립 만세 운동을 숙의 하였다.
그러나 독립만세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서 이곳에서 23일 학생측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소각하고 28일 三·一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편 당시 차상진(車相晋) 담임목사는 “十二人等의 狀書”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하고 투옥당하였다. 그 후로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수색을 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표지석> 3·1독립운동 기념터(3·1獨立運動 記念址) : 승동교회
3·1독립운동 거사(獨立運動 擧事)를 위해 학생대표(學生代表)들의 모의(謀議)하였던 곳.


<안내판> 탑골공원 팔각정(塔谷公園八角亭, Palgakjeong Pavilion of Tapgol Park)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 시대: 1902년(광무 6)
소재지: 종로구 종로 2가 38-1번지 탑골공원
팔각정은 1902년(광무 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이 공원은 고종 대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栢貞安]이 건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탑골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안내판>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十层石塔|円覚寺址十層石塔, Ten-Story Stone Pagoda of Wongaksa Temple site)
지정번호: 국보 제2호 / 시대: 1467년(세조 13) / 소재지: 종로구 종로 2가 38-2번지
이 탑은 세조(世祖)가 세운 원각사(圓覺寺) 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에도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십층 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率睹婆]를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亞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 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원각사지 10층석탑 앞에서 노인 두 분이 작은 태극기를 꽂아놓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가락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고 계셨다.



<표지석> 3·1독립운동기념터: 종로 YMCA(獨立運動記念址)
이 기독청년회관(Y.M.C.A.)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써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



<표지석> 김상옥 의거 터(金相沃義擧址, Site of Kim Sangohk’s Patriotic Deed)
김상옥(1890~1923)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12일 이곳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일본 경찰과 격전을 벌이다 그달 22일 효제동에서 순국하였다.

1호선 종각역 8번출구 입구에 세워진 불령선인 김상옥 의사 의거지 표석은 지하철 환풍기와 오고가는 인파 속에 가려져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표지석>
이 건축물은 1926년 7월 5일 신축하여 일제치하 동아일보·조선일보와 함께 민간 3대 신문의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1933~1937)의 사옥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독립운동가인 유정 조동호(榴亭 趙東祜)의 후원으로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이 사장에 취임한 후 1936년 8월 13일자 신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가 1937년에 폐간되었다.
1970년부터 농협중앙회에서 사용해 오고 있으며 2002년 ‘서울특별시 고시 제 2002-27호’에 의해 건물 전면 원형보존을 요하는 근대 건축물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에 증축되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조선중앙일보 사옥의 표석에는 아예 제목 역할을 하는 표제어가 빠져 있다.


<안내판> 수진궁(壽進宮, Sujin Palace)
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 등과 함께 중요한 궁의 하나였다. 수진궁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조선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저택이었다 한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왕자와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옹주들을 합사(合祀: 합동으로 제사를 모심)하는 사우(祠宇)로 변하였다.
수진궁(壽進宮)의 위치는 조선후기 여러 지도를 통해 추정가능하다. 또 구체적인 필지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는 규장각의 소장되어 있는[가사(家舍)에 관한 조복문서(照覆文書)] 중, <수진궁 및 용동궁 건물 측량 토지 조사보고(壽進宮及龍洞宮建物附屬土地調査報告)에 도면이 남아있어 이를 일제강점기 지적도에 중첩해 보면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사지역은 1908년에 건립된 수진측량학교(壽進測量學校)의 옛터로 확인된다.


<표지석> 수진측량학교터(壽進測量學校址)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이 수진궁(壽進宮)을 빌려 측량전문교육기관(1908~1909)을 세웠던 곳.



<표지석> 정도전 집터(鄭道傳 家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司僕寺), 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 섰고 일제때에는 수송국민학교(壽松國民學校)가 세워졌었다.



<표지석> 혜정교터(惠政橋址)
중학천(中學川) 위에 놓였던 다리로 복청교(福淸橋)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도 하였음

실제로는 가마에 물을 끓여 사람을 걸상 위에 앉히고 삶는 시늉만 하는 팽형(烹刑)이 행해진 것이라고 하는데, 표석의 내용만 보면 마치 처형이 집행된 것으로 오독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