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주년 삼일절을 맞아 가회동과 종로 일대 일부를 돌아보았다. 제39차 역사문화트레킹이다. 기록은 주요 포스트의 안내판과 표지석의 내용으로 대신한다.
<안내판>
3·1운동 유적지 : 유심사 터(惟心社址)
3·1운동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가 있던 곳. 만해 한용운(1879~1944)이 이곳에서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를 주도하였다.
<안내판>
석정보름우물(石井十五井, Seokjeong Full Moon Well)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우물은 주된 음수, 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었던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데다,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궁궐 궁녀들이 몰래 떠다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안내판>
3·1운동 책원비(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Memorial)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소재지: 종로구 창덕궁길 164(중앙고등학교 교정)
규모: 높이 2.5m, 폭 2.1m
1919년 중앙고등학교 교장이던 송진우, 김성수 그리고 교사이던 현상윤 등이 모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 작성 등 3·1운동 계획을 세우던 곳이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이었기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가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책원비를 건립하였다.
[비문 내용]
1910년 8월 29일 우니라나는 포악무도한 왜적으로부터 그 유례가 없는 굴욕적인 침략을 받아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민족의 자유는 여지없이 박탈당하여 삼천리 강산은 흡사히 감옥으로 변하고 2천만 동포는 누구나 포로가 되는 고초를 겪었으며, 이런 무리한 탄압은 날로 심하여 우리는 거의 질식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에 종결되고 만국평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미국 대통령 윌슨씨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민족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가 결정지을 것이라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하 생략
<안내판>
중앙고보 숙직실 터(The Site of a Night Duty Room at Choongang-gobo)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일본에서 추진하던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을 국내에 알려, 3·1운동을 촉발시킨 곳이다.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1919년 1월 중앙고보를 방문하여 숙직실에서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와 만나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을 촉진하였다.
중앙고보 숙직실은 1917년 김성수가 계동 교사를 지으면서 교장 사택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현재의 강단 정문 앞에 있던 당시 숙직실은 강당을 지으면서 철거하고 1973년 ‘3·1기념관’으로 복원하였다.
<안내판>
3·1기념관(3·1紀念館)
중앙학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3·1운동이다.
당시 중앙학교의 교사와 숙직실은 우국인사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건물이 당시 중앙학교의 숙직실이었고 여기에서 인촌 김성수를 비롯 고하 송진우, 기당 현상윤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 3·1운동을 모의했다.
구체적인 거사 계획은 인촌, 고하, 기당 세사람이 이곳에서 처음 발의했고 인촌을 배후에 두고 49인이 거사를 주도했으며 이들 중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낭독했다.
중앙학교는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1973년 당시 숙직실을 복원 3·1기념관을 설치하고 3·1운동 책원지비를 세운다.
위 사진은 가회동 북촌로 돈미약국 인근의 한옥 처마를 촬영한 것이다. 이 동네 한옥엔 함석 차양이 많이 보인다.
<표지석>
손병희선생집터(孫秉熙先生家址, House of Son Byeonghui)
손병희(1861~1922) 선생은 구한말의 천도교(天道敎) 지도자이자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에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표지석>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터(Original site of the Joseon Language Society)
조선어학회는 1921년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아래 사진은 덕성여중과 덕성여고를 잇는 다리를 촬영한 것이다. 덕성여중 담장쪽에 천도교중앙총부지 표석이 있다.
<안내판>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The Headquarters of Chondogyo)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소재지: 종로구 율곡로3길 49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3·1운동 계획을 논의한 옛 천도교 중앙총부가 있던 곳이다.
천도교에서는 손병희의 지도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 인쇄 배포와 만세 시위를 통해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불교계와 제휴를 추진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계의 3·1운동 통합 논의에서 중심이 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천도교 중앙총부 본관 건물은 1910년 2층으로 건립되었고, 1921년 경운동 신축 교당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옛 건물은 사라지고 덕성여자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표지석>
삼일독립선언유적지
이 집터는 본래 중종때 순화공주의 궁터라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삼일독립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 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히 사로잡혔다. 그 뒤 남감리 교회는 이 터를 매수하여 태화기독교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 되었으나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건물이 헐리게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줄잡아 둔다."
건립일 1997년 3월 1일
당초 건립 1982년 8월 15일
오리 전택부 글
해청 손경식 글씨
<안내판>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THE SIGNING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기미년(1919년) 3월 1일, 이곳(당시 명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 선언식을 통해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2년 후인 1921년, 감리교 여성 선교사는 이곳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선도적인 복지 사업을 펼치며 하나님의 큰 평화를 실현하고자 ‘태화여자관’의 문을 열었다. 태화복지재단은 이처럼 유서 깊은 장소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독립 선언 장면을 기록화로 제작하였다.
<표지석>
순화궁터(順和宮址)
조선조 헌종(憲宗)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 金氏, 金祖根의 딸) 사당인 순화궁(順和宮)이 있었던 자리
<표지석>
이율곡(李栗谷)
선생 살던 집터
이 언저리는 이이(李珥) 이율곡(1536~1584) 선생이 살던 절골 집터
승동교회 내 이율곡의 집터 표석… ‘율곡 이이’가 아니라 ‘이이 이율곡’이라니… 표기가 요상하다. 아마도 글자 배치 때문이겠지만, 생경한 느낌이 든다. 최소한의 통일된 형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안내판>
승동교회(胜勝洞敎會|勝洞敎會, Seung Dong Presbyterian Church)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0호 / 시대: 1912년
소재지: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
이 건물은 1893년 미국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한 승동교회의 교회당으로 19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 주는 벽돌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책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의 학생대표들이 이 교회에 모여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 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승동교회는 한국 교회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행사가 이곳에서 많이 열렸다. 수리와 증축이 거듭되면서 건물의 외벽에 구조적 결함이 생겨, 외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철골로 보강하여 안전하게 복원하였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안내판>
승동교화와 三·一운동
승동교회 면려청년회장이었던 김원벽(金元璧)을 비롯해서 학생지도자들은 1919년 2월 20일에 승동교회 1층 밀실에서 三·一학생 독립 만세 운동을 숙의 하였다.
그러나 독립만세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서 이곳에서 23일 학생측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소각하고 28일 三·一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편 당시 차상진(車相晋) 담임목사는 “十二人等의 狀書”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하고 투옥당하였다. 그 후로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수색을 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표지석>
3·1독립운동 기념터(3·1獨立運動 記念址)
: 승동교회
3·1독립운동 거사(獨立運動 擧事)를 위해 학생대표(學生代表)들의 모의(謀議)하였던 곳.
<안내판>
탑골공원 팔각정(塔谷公園八角亭, Palgakjeong Pavilion of Tapgol Park)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 시대: 1902년(광무 6)
소재지: 종로구 종로 2가 38-1번지 탑골공원
팔각정은 1902년(광무 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이 공원은 고종 대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栢貞安]이 건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탑골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안내판>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十层石塔|円覚寺址十層石塔, Ten-Story Stone Pagoda of Wongaksa Temple site)
지정번호: 국보 제2호 / 시대: 1467년(세조 13) / 소재지: 종로구 종로 2가 38-2번지
이 탑은 세조(世祖)가 세운 원각사(圓覺寺) 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에도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십층 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率睹婆]를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亞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 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원각사지 10층석탑 앞에서 노인 두 분이 작은 태극기를 꽂아놓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가락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고 계셨다.
<표지석>
3·1독립운동기념터: 종로 YMCA(獨立運動記念址)
이 기독청년회관(Y.M.C.A.)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써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
<표지석>
김상옥 의거 터(金相沃義擧址, Site of Kim Sangohk’s Patriotic Deed)
김상옥(1890~1923)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12일 이곳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일본 경찰과 격전을 벌이다 그달 22일 효제동에서 순국하였다.
1호선 종각역 8번출구 입구에 세워진 불령선인 김상옥 의사 의거지 표석은 지하철 환풍기와 오고가는 인파 속에 가려져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표지석>
이 건축물은 1926년 7월 5일 신축하여 일제치하 동아일보·조선일보와 함께 민간 3대 신문의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1933~1937)의 사옥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독립운동가인 유정 조동호(榴亭 趙東祜)의 후원으로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이 사장에 취임한 후 1936년 8월 13일자 신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가 1937년에 폐간되었다.
1970년부터 농협중앙회에서 사용해 오고 있으며 2002년 ‘서울특별시 고시 제 2002-27호’에 의해 건물 전면 원형보존을 요하는 근대 건축물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에 증축되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조선중앙일보 사옥의 표석에는 아예 제목 역할을 하는 표제어가 빠져 있다.
<안내판>
수진궁(壽進宮, Sujin Palace)
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 등과 함께 중요한 궁의 하나였다. 수진궁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조선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저택이었다 한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왕자와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옹주들을 합사(合祀: 합동으로 제사를 모심)하는 사우(祠宇)로 변하였다.
수진궁(壽進宮)의 위치는 조선후기 여러 지도를 통해 추정가능하다. 또 구체적인 필지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는 규장각의 소장되어 있는[가사(家舍)에 관한 조복문서(照覆文書)] 중, <수진궁 및 용동궁 건물 측량 토지 조사보고(壽進宮及龍洞宮建物附屬土地調査報告)에 도면이 남아있어 이를 일제강점기 지적도에 중첩해 보면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사지역은 1908년에 건립된 수진측량학교(壽進測量學校)의 옛터로 확인된다.
<표지석>
수진측량학교터(壽進測量學校址)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이 수진궁(壽進宮)을 빌려 측량전문교육기관(1908~1909)을 세웠던 곳.
<표지석>
정도전 집터(鄭道傳 家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司僕寺), 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 섰고 일제때에는 수송국민학교(壽松國民學校)가 세워졌었다.
<표지석>
혜정교터(惠政橋址)
중학천(中學川) 위에 놓였던 다리로 복청교(福淸橋)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도 하였음
실제로는 가마에 물을 끓여 사람을 걸상 위에 앉히고 삶는 시늉만 하는 팽형(烹刑)이 행해진 것이라고 하는데, 표석의 내용만 보면 마치 처형이 집행된 것으로 오독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