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31일 월요일

반촌 역사문화트레킹

7월 15일 제33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옛 성균관을 뒷받침하던 반촌(泮村) 일대를 둘어보았다. 4호선 4번출구에서 나와 직진하면 혜화동 새마을금고 골목에 관어당(觀魚堂) 자리가 있다. 장욱진(1917~1990) 화백의 화실이 있던 공간(명륜동2가 22-2)인데, 지금은 불가마사우나와 치킨집이 들어서 있다.


우리은행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부산에서 돌아온 장욱진은 궁핍했다. 부인 이순경 씨(식민사학자로 알려진 이병도의 딸)가 책방을 차려 가계를 꾸려나갔는데, 이것이 65년을 이어온 동양서림(혜화동 114-2)의 시작이다. 왼편의 금문 역시 3대째를 이어오고 있는 혜화동의 대표 중식점이다.
1947년 7월 19일 정오, 동양서림 앞 혜화동로터리는 계동 자택으로 귀가하던 몽양(夢陽) 여운형(1886~1947) 선생이 흉탄을 맞고 쓰러져간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혜화동 107번지는 편운(片雲) 조병화(1921~2003) 시인이 50여 년을 살았던 집이 있다. 천상병이 우리네 인생살이를 ‘소풍’으로 묘사했다면, 조병화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표현하였다.


장면가옥(등록문화재 제37호)은 제2공화국의 내각 수반인 운석(雲石) 장면(1899~1966) 선생이 30년 남짓 거주한 곳이다. 당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중심제에서 장기간의 독재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의원들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장면 내각(1960.8~1961.5)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마련하고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등의 성과도 내었으나, 5·16 군사정변(1961)으로 집권 9개월 만에 붕괴되고 만다.


향정(香庭) 한무숙(1918~1993) 작가가 1953년부터 40년을 살았던 집(명륜동1가 33-100)이 한무숙문학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관람을 위해서는 인터넷이나 유선으로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고급스런 분위기의 응접실에는 박종화, 서정주, 김기창, 프란체스카 여사 등 문인과 명사들의 글과 그림이 가득했다.


향정헌(香庭軒)의 자그마한 정원은 화초와 석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한무숙의 작품은 국어 교과서에 잘 실리지 않아 「이사종의 아내」 정도 밖에 알지 못했는데, 학예사로부터 소설집 한 권씩을 기념품으로 받아왔다.


현대하이츠빌라(명륜1가 22) 302호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1997년에 종로 출마를 위해 이사와서 2003년 청와대 입성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왼편에는 탕평비(蕩平碑)가 있다. 영조가 성균관 유생들은 당쟁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뜻으로 1742년에 세운 비석이다.


문묘(文廟)의 정문인 신삼문(神三門) 안쪽에는 성균관 역사와 설립과정을 새긴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비문은 춘정(春亭) 변계량(1369~1430)이, 뒷면의 음기(陰記)는 월사(月沙) 이정구(1564∼1635)가 지었다.


대성전(大成殿)은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사당으로 5성(공자·안자·증자·자사자·맹자), 공문10철, 송조6현, 동국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02년(선조35)에 나주향교의 대성전을 원형으로 삼아 중건했다. 현판은 석봉(石峯) 한호(1543∼1605)의 친필이다.


대성전 서쪽에는 수복청(守僕廳)이, 수복청 남쪽에는 대전고·동무고·서무고의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대학당(戴學堂)이라는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명륜당(明倫堂)은 유생들의 강학 공간으로 과거장으로도 활용됐다. 현판은 1606년에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1천원 지폐의 앞면에 도안된 명륜당에는 문이 달려 닫혀 있는데, 현장의 명륜당은 오픈형 마루 형식이다. 월대 위의 비석은 1871년 3월 9일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유생들의 반발로 훼손되어 비문의 내용은 확인이 어렵다.


상급생이 거처하는 동재(東齋)와 하급생이 머무는 서재(西齋)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모두 28개의 방이 있다. 명륜당 마당 방향으로는 창호가, 반대편으로는 방문이 나 있는 구조이다. 동재의 첫번째 방 창호쪽에는 얼핏 대포처럼 보이는 바퀴 달린 의문의 포말소화기가 놓여 있고, 두번째 방 창호 쪽에 식고(食鼓)가 매달려 있다.


향축(香祝)을 보관하고, 제사 지낼 때 제관들이 머무는 향관청(享官廳)의 좌우에는 감찰(監察) 집사(執事)들이 사용하던 동월랑과 서월랑이라는 부속건물이 있다. 동월랑(東月廊)의 외부는 현재 일반 민가와 연결된 듯한 모습이다.


‘봄을 모은다’는 뜻의 집춘문(集春門)은 임금이 창경궁을 나와 문묘나 성균관으로 거둥할 때 이용하던 전용문이었다.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고, 현재의 율곡로를 닦아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키면서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지금도 집춘문 밖에는 개인주택들이 들어서 있어 왕래가 불가능하다.


홍화문 북쪽의 월근문(月覲門)은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 경유하던 문으로 1779년(정조 3)에 건립되었다. 창경궁 동남쪽의 선인문(宣人門)은 조정의 신하들이 출입하였는데, 원래 이름은 서린문(瑞燐門)이다.


대한의원(연건동 28-21)은 광제원(1899), 의학교와 부속병원, 대한국적십자병원을 1907년에 통합하여 만든 종합병원으로 국내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1885)의 맥을 잇고 있다. 또한 대한의원 시계탑은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건립된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가장 오래된 시계탑이다. 대한의원 건물 내에는 의학박물관이 설치돼 있다.


‘봄을 머금는다’는 뜻의 함춘원(含春苑)은 창경궁에 딸린 정원으로 활쏘기를 관람하고 말을 방목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764년(영조40),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을 함춘원으로 옮기고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1776년(정조1)에는 정조가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하고 확장했다. 1899년(광무3),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여 신위를 종묘 영녕전으로 옮겨간 후부터 사당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1924년, 일제가 민립대학설립운동의 반향으로 경모궁 자리에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의학부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졌다. 현재는 정면3칸·측면2칸의 내신문과 정당 터만 남아 있다. 사적 제237호로 지정된 문화재 명칭은 서울 경모궁지(연건동 28-2)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종의 외증손(태종의 4번째 딸의 손)으로 기록된 남이 장군의 집터 표지석(연건동 78-4)이다. 1457년(세조3)에 17살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유자광 등의 모함으로 주살되었다. 효창공원앞역 인근(용문동 107)에 사당이 있다.


대한제국 탁지부 건축소에서 근대 기술교육을 목적으로 1907년 11월 기공해 1909년 3월 준공한 것이 공업전습소였다. 그러나 1912년에 일제가 중앙시험소를 지으면서 헐어버렸다. 그런데 총독부가 지은 중앙시험소 건물을 후에 공업전습소가 사용하게 됐다. 그러니 구공업전습소본관(사적 제279호)이라는 문화재 명칭이 명확한 것은 아닌 셈이다. 100살이 넘은 ㄷ자형의 회백색 2층 목조건물은 나무판을 붙여놓은 외벽이 이채롭다. 현재는 방송대의 우체국과 역사기록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술가의 집(동숭동 1-130)은 1924년에 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본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사용중이다. 대학로 건너편의 서울대학교의과대학 본관 건물과 판박이로 닮아 있다.



마로니에 공원 동쪽에는 아르코미술관(동숭동 1-130)이 있다. 아르코예술극장·샘터파랑새극장과 붉은 벽돌로 이어지면서 건물의 안과 밖을 소통의 공간으로 설정했다는 평가를 받는 건축물로 김수근의 작품이다. 마로니에공원에는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 일경과 전설의 400:1 맞짱을 떴던 불령선인 김상옥 의사의 상이 세워져 있다. 오우가·만흥·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생가터 표지석도 볼 수 있다.


1956년 문을 연 학림다방(명륜4가 94-2)은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학림(學林)사건의 주무대였다. 몇 년 전엔 SBS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장소로 또다른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흥사단(興士團)은 무실역행(務實力行)의 가르침으로 유명한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 선생이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된 시민사회단체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