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30일 일요일

불암사, 천보사 역사문화트레킹

제21차 역사문화트레킹은 불암산 쪽으로 다녀왔다. 불암동과 후암동을 운행하는 파란색 202번 버스를 타고 불암동(42-066)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불암동 갈비골목이 나온다.


노란 은행나무잎이 떨어진 불암천변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니 왼편에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이 보인다.


기도원과 절집이 코앞인데… 왕갈비, 민물장어, 해장국, 감자탕, 유황오리, 옻닭, 송어회, 메기탕 등의 광고판을 써붙인 식당들이 연회석 완비, 단체예약 환영 등의 삐끼 문구와 함께 요란하게 시각을 자극하며 늘어서 있다. 문득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를 일심의 논리로 해결하려 한 원효스님의 화쟁(和諍)이 떠올랐다. 불암사 일주문(一柱門)에는 ‘불암산 불암사’가 아닌 ‘천보산 불암사’라 씌어 있다. 산의 모습이 송낙을 쓴 부처의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불암산(佛岩山)의 이명이 천보산(天寶山), 필암산(筆岩山)이므로 어긋난 이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암산(佛岩山)의 암과 불암사(佛巖寺)의 암은 똑같은 ‘바위 암’자를 쓰지만 한자가 다른 듯하다. 불암사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천왕문(天王門)은 사찰의 삼문 가운데 2번째 문이다. 불암사 천왕문 왼편에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오른편에 남방 증장천왕, 동방 지국천왕이 그려져 있다. 불이문(不二門)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천왕문에서 올려다본 대웅전의 모습을 담아 봤다.


범종루는 불전사물 중 법고, 목어, 운판이 없는 작은 규모이다. 12지신상이 좌우로 도열한 계단을 오르면 70년대에 조성한 마애삼존불상이 나온다. 본존과 좌우협시의 수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이 합쳐진 통인(通印)으로 보인다.


1731년에 세워진 사적비를 통해 불암사의 역사를 가늠해볼 수 있다. 불암사는 신라 헌강왕 16년(824)에 지증국사가 창건하고 나말에 도선국사가 재창, 여말선초에 무학대사가 삼창하였다고 한다. 비문의 마모가 심해 제대로 읽어내기가 어렵다. 세조 때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원찰을 정할 때 서진관, 남삼막, 북승가와 함께 동불암으로 꼽혔다고 한다.


사적비 건너편의 등산로를 따라 450m 정도 올라가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소속의 천보사(天寶寺)다. 불암사 종각루보다는 규모가 컸지만 천보사 종각루에도 불전삼물 없이 범종만 달려 있다. 종각루쪽에서 별내신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코끼리바위 아래의 천보사 대웅전 모습을 담아봤다. 맞배지붕의 대웅전 용마루 양끝에 용두, 중앙에는 코끼리 2마리, 대웅전 앞 월대 양쪽에 석호가 조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요사채가 사원의 풍광을 흐려놓고 있다는 느낌이다.



화장실 오른편의 등산로가 정상으로 이어진다. 불암산 남쪽 능선에 오각형 형태로 자리한 불암산성(佛岩山城)은 236m의 소규모 산성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천오백년 묵은 중요한 역사유적인데 뒤늦게나마 지난 2010년 경기도 기념물 제221호,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음에도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헬기장 아래쪽 무너져내린 성벽과 너부러진 성돌을 촬영하고 싶었지만, 막걸리 마시는 등산객들과 동선이 겹쳐 맘이 상해 그만두었다.


하산길은 천보사 일주문 방향으로 잡았는데, 구불구불 급경사의 공구리 찻길이어서 걷기가 많이 불편했다. 더구나 내년 1월까지 ‘별내6동 배수로 및 도로재포장 공사’ 중이기에 이쪽 길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천연보궁 천보사의 일주문은 지붕이나 장식 없이 거대한 통나무 3개를 올려놓은 단출한 형태여서 오히려 특이한 멋이 있다.


산 전체의 80%까지 내려온 시점을 단풍의 절정이라고 한다면, 불암산의 단풍 절정은 다음주나 다다음주가 될 거 같다. 가을 편지에 어울리는 가을 맛나는 산행…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

2016년 10월 29일 토요일

남산골 한옥마을 전통가옥 둘러보기

수방사가 있던 자리에 조성한 남산골의 한옥마을을 탐방했다. 4호선 충무로역 3번·4번출구에서 바로 찾아갈 수 있다. 남산골한옥마을은 2,400여 평(7,934m²) 공간에 중구 삼각동의 도편수 이승업 가옥(구 조흥은행 관리), 종로구 삼청동의 오위장 김춘영 가옥(구 김홍기 가), 종로구 관훈동의 민씨 가옥(구 이진승 가), 동대문구 제기동의 해풍부원군 윤택영 가 재실(구 정규엽 가), 종로구 옥인동의 윤씨 가옥(구 서용택 가) 등 서울 시내의 전통 가옥 5채를 이전 복원하여 1998년 4월 18일 개관하면서 서울의 관광명소가 됐다.

탐방 첫 집은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三角洞 都片手 李承業 家屋)이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공사에 참여했던 최상급 도편수가 지은 집이어서 그런지 양반집이 아닌데도 격조가 느껴진다. 섬돌이 3단이고, 특히 처마의 맵씨가 아릅답다.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三淸洞 五衛將 金春榮 家屋)은 조선후기 중앙군인 5위의 무관이었던 김춘영이 1890년대에 지은 집이다. 대문간 바로 왼편에 작은 사랑채를 두었다. 양반네들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지만 필요한 것은 다 갖추었다는 느낌이다.


경인미술관 자리에 있던 민영휘 저택 가운데 일부를 옮겨 놓은 관훈동 민씨 가옥(寬勳洞 閔氏 家屋)은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짐작케 했지만, 오늘따라 결혼식 등 행사로 분주하여 폰에 많이 담지는 못했다. 한때 ‘박영효 가옥’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祭基洞 海豊府院君 尹澤榮 齋室)은 윤택영이 사위인 순종의 제례 참석에 도움을 주고자 조성한 특이한 공간이어서 용도부터가 일반 가옥과 다르다.


1910년대에 지었다고 알려진 옥인동 윤씨 가옥(玉仁洞 尹氏 家屋)은 벽수산장의 일부로 추정되는 옥인동의 가옥을 그대로 본떠 복원한 것으로 민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머리에 익공(翼工)을 치장하는 등 관훈동 민씨 가옥과 함께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보여주는 집이다.


둘러본 5채 모두가 각기 다른 구조와 디자인으로 저마다의 특색이 있다. 한옥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갖추어지면 좀더 흥미로운 탐방이 될 듯하다.

2016년 10월 27일 목요일

녹로 vs 거중기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과목과 6학년 2학기 과학 과목에는 녹로와 거중기 같은 도르래 관련 부분이 나온다.
도르래는 바퀴에 홈을 파고 줄을 걸어서 돌려 물체를 움직이는 장치로 두레박, 기중기 따위에 이용되며 고정 도르래와 움직 도르래가 있다. 도르래를 이용하면 힘의 방향을 바꾸어 주거나(고정 도르래), 물체의 무게보다 작은 힘으로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다(움직 도르래)는 것이 핵심이다. 즉 도르래를 이용하면 힘의 방향 또는 힘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물체의 무게와 올라간 높이가 같다면 고정 도르래를 사용하든 움직 도르래를 사용하든 복합 도르래를 사용하든 한 일의 양은 모두 같다.
도르래는 지레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고정 도르래는 작용점, 받침점, 힘점 순서로 되어 있는 지레이고, 움직 도르래는 받침점, 작용점, 힘점 순서로 되어 있는 지레이다.


다산유적지(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전시된 녹로(轆轤)와 거중기(擧重機) 모형을 촬영해봤다.


녹로는 고정 도르래를 이용하여 물건을 높은 곳으로 옮기는 장치로, 오늘날의 크레인과 비슷하다.
거중기는 실학자인 정약용이 중국의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개발한 것으로, 여러 개의 고정 도르래와 움직 도르래를 이용한 복합 도르래이다.
움직 도르래에 물체를 매단 다음, 고정 도르래에 걸린 줄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도록 설계되어, 주로 낮은 곳의 돌을 쌓을 때 사용하였다.


수원 화성 건설에는 거중기와 녹로 등의 과학기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힘을 덜 쓸 수 있었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곽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정 도르래

움직 도르래
바퀴를 고정시켜 사용
구조
바퀴가 물체와 함께 움직임
줄을 당기는 힘은 물체의 무게와 같다.(힘의 이득이 없다.)
물체 무게의 1/2만큼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 있다.(힘은 2배 이득이다.)
물체가 올라간 높이와 줄을 당긴 거리는 같다.(거리의 이득이 없다.)
이동 거리
당겨야 하는 줄의 길이가 2배로 늘어난다.(이동 거리는 2배 손해이다.)
힘과 이동 거리의 이득이 없으므로 일의 이득도 없다.
일의 양
힘의 이득이 있으나 이동 거리가 길어져 일의 이득이 없다.
힘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장점
적은 힘으로 물체를 들어올릴 수 있다.
국기 게양대, 엘리베이터, 두레박, 블라인드, 네트 고정대
이용 예
기중기(크레인), 거중기

2016년 10월 26일 수요일

다산유적지 역사문화트레킹

지난 토요일(10.22)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다산유적지를 다녀왔다. 운길산역은 중앙선 복선 전철화에 따른 선로 이설로 인해 폐역된 기존 능내역을 대신하여 신설된 역으로 인근의 운길산(雲吉山, 610m)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운길산역을 시작으로 마재성지, 능내역, 다산문화원, 다산기념관, 묘소, 생가(여유당), 생태공원 순으로 5㎞ 넘는 길을 트레킹했다.


옛적에 박씨 선조가 한양가는 길에 해가 저물어 잠시 쉬게 되었는데, 새소리가 듣기 좋고 물이 좋아 가려던 길을 멈추고 이곳에서 살기로 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조동(새울·새월)이란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동리의 조(鳥)와 사안리의 안(安)이 합쳐져 조안리(鳥安里)가 되었다.


마재마을은 말을 타고 넘던 고개라 마현(馬峴)으로 불리던 곳이다. 마재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초대명도회장이자 최초로 한글 교리서를 쓴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와 부인 유조이(체칠리아) 성녀, 장남 정철상(가롤로) 복자, 차남 성 정하상(바오로), 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 가족의 순교를 기리고자 봉헌된 성지이다.


능내역(陵內驛)은 중앙선의 신호장이었다. 2008년 12월 29일에 중앙선 광역전철의 운행구간이 국수역까지 연장되면서 선로가 이설되어 폐역되었고, 3.5㎞ 떨어진 곳에 운길산역이 신설되었다.


정약용(1762∼1836)은 영조 38년(1762) 경기도 광주 마현리(마재)에서 정재원(1730∼1792)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해남윤씨는 윤선도의 후손이자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1668∼1715)의 손녀이다. 정약용은 누나의 남편 이승훈(1756∼1801), 큰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1754∼1786)과 친하게 지냈으며,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1742∼1801)과도 교유하였다. 암행어사, 안렴사, 곡산부사 등 지방관의 경험은 이후의 5백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에 반영되었다.
다산문화관의 입구 왼편에 다산의 저술 목록을 목판으로 새겨 놓았다. 경학(修己)으로는 6경4서의 주석서, 시경강의, 매씨상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주역사전 등이 있고, 경세학(治人)으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아방강역고, 대동수경 등이 있다.


정약용이 1800년(39세) 봄에 낙향하여 당호를 여유(餘猶)라하고 은둔하던 중 여름에 정조가 승하한다. 정조가 승하한 다음 해인 1801년(40세) 2월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순조 18년인 1818년(57세) 9월에야 해배되어 마현으로 귀향하였다.


탁트인 시야의 북한강과 수목들이 조화롭게 꾸며진 다산생태공원은 부담없이 걷기에 좋은 자연친화적인 트레일이었다.



운길산역에서 다산유적지 입구까지 좌편으로 북한강을 두고 걷는 트레일은 자전거길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명박 가카 작품인 ‘4대강 국토종주 남한강 자전거길’이란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반면, 도보여행자를 위한 제대로 된 이정표는 거의 없어 특히 초행자 입장에서 방향이 맞는 것인지 많이 헷갈렸다.
또한 양방향 자전거길과 보행로, 이렇게 3개의 길이 구분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타는 인간들(자라니)은 멋대로 보행로에 진입하여 페달을 밟아댔다. 도로교통법에 의하면 자전거는 ‘車’로 규정되므로 자전거를 타고 인도나 횡단보도를 운행하는 것은 불법행위이다. 반드시 자전거를 끌고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거꾸로 현행법상 자전거도로에서 두발로 걷거나 달리는 것은 위법행위가 아니다. 하물며 정해진 보행로를 걷고 있는 보행자에게 위협이 돼서야 되겠는가. 그러다가 접촉사고라도 나서 보행자가 다칠 경우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생각은 해보았는지… 라이더 폼새에 걸맞는 매너와 시민의식을 갖춰 주면 좋겠지만, 요원한 일이겠지.
‘국도 45호선 남양주 조안 진중~화도 금남 경관도로 조성공사’가 마무리되면 어떨런지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보행자에게 너무 위험한 길이어서 이쪽 다산길은 절대절대 비추~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다음에 대중교통을 이용한 재방문시에는 167번 버스를 타고 능내역에서 하차하여 마재성지를 거쳐 다산유적지로 안전하게 진입해 가야겠다.

2016년 10월 25일 화요일

‘경성의 친일파’ 특강과 답사

어제·오늘 서울역사박물관이 마련한 2016년 하반기 서울역사문화탐방 특강과 답사에 참여했다. 특강에서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언급한 조작적 정의에 따르면 친일파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일제에 부역한 자들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시기상으로는 1904~5년(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전후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이며, 대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국권침탈과 강압적 식민통치, 반인륜적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들을 뜻한다.

※ 역사적·사회적 의미의 친일파
 제1세대 친일파
 1910년 합병 이전
 매국형 친일파
 제2세대 친일파
 1910년 합병 이후
 직업형 친일파
 제3세대 친일파
 1937년 이후
 전쟁협력형 친일파

매국
(21명)
 을사오적
 이지용 등
  5명
 정미칠적
 송병준 등
  7명
 경술국적  이완용 등   9명
수작·습작
(138명)
 수작  박영효(후작), 민영린(백작),
 윤덕영(자작), 이윤용(남작)
 64명
 습작
 고희경, 송종헌
 74명


정독도서관 본관 2동 우측에 있는 우물은 그 연원이 고려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우물 일대는 을사오적(외무대신)과 경술국적(내부대신)의 2관왕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박제순(1858~1916)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계동의 한옥스테이 락고재(樂古齋)는 조선사편수관으로 일제에 부역했던 두계 이병도(1896∼1989)의 집이었다고. “1934년 일제의 식민문화통치에 대항하여 민족문화를 수호, 발전코자 설립한 진단학회가 있었던 곳”이라 써 있는 표지석의 문구는 맥락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


원파선생구거(圓坡先生舊居), 인촌선생고거는 김성수의 백부이자 양부인 원파 김기중(1859~1933)과 인촌 김성수(1891~1955)의 옛집이다. 대동세무고등학교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근대의 해평윤씨 가문에서 홀로 항일 행보를 밟았던 해위 윤보선(1897~1990). 안동교회 맞은편, 굳게 닫혀 있는 윤보선 가옥(사적 제438호)의 솟을대문이 향후엔 개방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종친부(宗親府)의 본채 경근당(敬近堂)과 복도로 연결된 옥첩당(玉牒堂)의 ‘옥’자는 양쪽에 옥구슬이 있는 형상이어서 특이한데, 아스키나 엡시딕 문자로도 어떻게 표기할 방법이 없네…
종친부에서 율곡로로 내려가는 길의 왼편 송현동 일대가 순종의 장인 윤택영(1876~1935) 후작, 오른편 간동 일대가 윤택영의 형 윤덕영(1873~1940) 자작의 나와바리였다고 한다. 이쪽 동네 전체가 해평윤씨 형제의 세거지였던 셈이다. 오고가는 사람과 차량이 많아 사진을 박지는 못하고, 대략적인 안내도만 수첩에 그려 넣었다.
이렇게 친일파의 집들을 찾아 답사 다니고 있던 그 시각… 다까끼 마사오(1917~1979)의 큰 영애께서 ‘최순실 연설문’ 관련하여 달랑 2분짜리 녹화된 대국민 사과문을 읽어내리고는 바로 휘익 퇴장해 버리셨다지 @_@"… 그래서인지 故 백남기 농민 시신 부검영장 2차 집행 시도도 일단 무산됐지. 견찰 지들도 맥아리가 빠졌던 게지. 최태민·최순실, 정윤회… 이자들이 우봉최씨, 해주정씨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충헌·최우, 정중부 이후 대략 800년만에 전권을 휘둘러댔군.


법륜사, 고종 후궁들의 처소 터를 지나 우회전… 동십자각, 광화문을 거쳐 윤덕영 첩 구옥, 벽수산장 터를 확인하고 박한용 실장이 안내한 이완용 저택에 도착. 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국적의 3관왕 타이틀을 보유한 일당 이완용(1858~1926)이 살던 집은 공사중이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 정이위 대훈위 후작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副議長 正二位 大勳位 侯爵 牛峯李公之柩)라고 씌여진 이완용의 명정은 원광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후일 같은 우봉이씨 일족인 이병도가 가져다가 태워 없애버렸다고 한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고 했던가. 은사금(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 년 5% 이자 지급)에 조선귀족작위에 중추원(조선총독 자문기구) 참여에… but,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이 국가에 몰수된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에서 1997년 당시 재판부는 재산을 돌려주라고 결정함으로써 이후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반환소송이 줄을 잇게 된다.

2016년 10월 17일 월요일

풍납토성 역사문화트레킹

10월 15일 토요일엔 제18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493년 동안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던 송파구 풍납동 일대를 탐방하였다. 명례방협동조합의 6번째 야행을 겸한 일정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참석률을 기대했지만, 기존 팀에서 노쇼(No-Show)가 나오면서 흐트러져 버렸다.
재작년에는 서울도보관광을 통해 몽촌토성 코스를 답사했고, 작년에는 서울시민연대에서 개최했던 한성백제역사문화강좌도 청강하고 답사했는데… 이 코스 리딩은 처음이다.


경당지구에서 동명왕을 모신 사당으로 추정되는 呂자 모양의 44호 건물지와 의도적으로 폐기한 어정(御井)을 살펴본 후, 미래마을부지에서 고대인들의 주거지를 둘러보았다.
이어서 정궁인 풍납토성(북성)과 별궁인 몽촌토성(남성)을 답사하면서 2성체제로 운영된 한성백제의 도성 시스템을 확인하였다. 가을날의 따사로운 햇살 속에 발로 걸으며 느꼈던 내용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눈으로 둘러보고 확인하는 것으로 트레킹을 마무리하였다.


방이동 먹자골목으로 뒷풀이 가는 길에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벌어진 제12회 서울평생학습축제에 들렀는데, 이건 뭐… 해가 갈수록 알짜가 줄어드는 느낌이네.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주말엔 세종마을 도보여행

오후엔 도심권50+센터 및 한양길라잡이와의 업무협약으로 세종마을가꾸기회가 주관하는 ‘주말엔 세종마을’ 도보여행에 참가했다. 봄에 해설과정을 모집하고  답사와 시연 과정을 거쳐 7월부터 실전 해설에 돌입한 지역특화사업인데, 다음주(10월 16일)에 시즌 마감한다고 해서 어제 오전에 부랴부랴 신청하여 다녀온 것이다.
사실 서촌 명칭의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 예전처럼 상촌(上村)이라는 뜻의 우대(웃동네)로 부르는 것이 좋겠지만, 옛 북부 준수방은 세종대왕의 탄생지이므로 2010년부터 지역주민들이 고쳐 부르고, 2011년 종로구지명위원회에서 의결했다는 ‘세종마을’로 부르는 것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사진은… 통의동 백송 ~ 이상의 집 ~ 노천명 가옥 ~ 이상범 가옥 ~ (이중섭 화실) ~ 박노수 가옥 ~ 윤동주 하숙집 터 ~ 수성동 계곡 ~ 옥인아파트 터 ~ 윤덕영첩 구옥 ~ 벽수산장 터 ~ 가재우물 ~ 벽수산장 입구의 다리 ~ 자수궁 터 ~ 대오서점 순이다.

경복궁역 4번 출구를 나와 왼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통의동 백송 터가 나오는데, 이곳은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彰義宮) 터 및 추사 김정희 선생 집터이기도 하다. 통의동 백송은 높이 16m, 둘레 5m, 수령 6백년의 노송으로 1962년 12월 천연기념물 4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1990년 여름에 몰아친 태풍으로 갈라진 뒤 회생작업에도 불구하고 1992년 7월 고사(枯死) 판정을 받아 천연기념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마음이 짠하지만 베어진 그루터기 옆으로 어린 백송 4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횡단보도를 건너 통인동 우리은행(효자동 지점) 이면도로에 들어서면 천재 문학가 김해경(1910~1937)이 23살까지 살았던 집터 일부를 고쳐 지은 통유리의 기와집을 만날 수 있다. 단편 「날개」에서 매음하는 아내가 주는 아스피린(실제는 아달린)이나 받아 먹으며 무기력하게 빈둥대는 1930년대 지식인의 모습은 이곳 ‘이상의 집’에서 구상된 것이 아닐까 궁금해진다.


누하동 골목의 장애아동시설 ‘라파엘의 집’ 맞은편에 서울시 미래유산인 노천명(1911~1957) 가옥이 있다. 대표작 「사슴」으로 유명해졌으나, 1943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다. 6·25 전쟁 당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사회주의 문화인 행사에 참여하여 서울수복 후 좌익분자 혐의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시인은 1949년 이 집에 안착하여 양녀와 8년 간을 살다가 뇌빈혈로 쓰러져 46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역광… 사진을 잘못 박았다.


종로기업(주)에서 필운대로 건너편 청운자동차공업사 옆 누하동 골목 안쪽에는 이상범 가옥과 화실(등록문화재 제171호)이 있다.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은 근대 산수화의 대가로 청전(靑田) 양식이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1936년 동아일보에 재직시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기도 했으나, 40대 이후에는 훼절하여 일제에 부역하였다.


「흰소」로 유명한 이중섭(1916~1956)이 개인전을 준비하던 누상동 2층집은 대략의 위치만 가늠하고 옥인길을 건너갔다.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의 백부라는 신분에도 스스럼없이 매국행위를 자행한 윤덕영(1873~1940)이 자기 딸을 위해 1937년 지은 한·양 절충식 집을 1973년 남정 박노수(1927~2013) 화백이 소유하여 2011년 말까지 거주한 박노수 가옥은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1991)로 등록돼 있다. 2011년 종로구에서 기증받아 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운영 중인데, 입장료로 2천원을 받고 있다. 연예인 이민정이 박노수의 외손녀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1917~1945)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김송(1909~1988)의 집에서 2달간 머물며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주옥같은 명시들을 썼다고 한다.
윤동주 하숙집 터 앞쪽에는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밤을 구워 팔고 있었다.


옥인길을 올라 끝에 다다르면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 「수성동」의 배경이 된 수성동 계곡을 만나게 된다.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1442년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노닐던 계곡이다. 그림에 보이는 기린교로 추정되는 작은 돌다리가 걸쳐져 있다. 경복궁역에서 10분 간격으로 오가는 9번 마을버스를 타면 수성동 계곡까지 편하게 갈 수 있다. 마을버스 노선도를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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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연결된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니 윤덕영의 첩이 살았다는 한옥이 나왔다. 1910년대 지어진 집으로 처마에 익공을 달았고, 민간에서 보기 어려운 고급주택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희소성이 있다고 한다. 1977년 문화재로 지정됐다가 1997년 해제됐는데, 지금은 7가구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재개발조합과 지자체의 갈등 만큼이나 문 틈으로 보이는 살림살이가 어지러워 보였다.


천수경(?~1818)이 인왕산 옥류천 위에 송석원을 짓고 평민들의 시사 모임을 열었던 곳을 후에 윤덕영이 사들여 건평 1,983㎡에 달하는 프랑스풍의 초호화 별장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1966년 화재로 전소됐다는데, 추사가 썼다는 松石園 글자 또한 찾기 어렵다. 지금은 ‘우리술 문화공간’이 들어서 있다.


김상헌의 후손인 가재 김창업(1658~1721)이 팠다는 가재우물 터는 그 흔적조차 짐작하기 힘든 상태였다.


벽수산장 입구의 다리가 있던 터라고 설명 들은 거 같은데… 어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중에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 그런데 저 ‘오’자 낙서는 무어냐? 자랑스런 한글이지만, 한글이라 부끄러운 경우도 있다.


문종이 이복동생인 무안대군 이방번의 집을 수리하여 세종의 후궁들이 거처하도록 마련한 처소가 자수궁(慈壽宮)이다. 성종의 계비였던 폐비 윤씨,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도 퇴궁 당한 후 자수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궐 밖으로 나온 자수궁의 후궁들은 불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수궁은 자수원(慈壽院)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후 현종 대에 혁파하여 북학(北學)을 세웠는데, 지금은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고추짜장면으로 유명한 영화루(중국집)를 지나면 1934년 지은 ㄷ자형 한옥 건물로 1951년에 문을 연 대오서점이 나온다. 안채 일부를 카페로 꾸며놓은 듯한데, 칠이 벗겨진 간판 등을 통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코스에는 없었지만 촬영해 봤다.


좁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찾아 다니는 건 쉽지 않다. 2시간에 걸쳐 친절히 해설해 주신 민평순, 이혜옥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