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5일 금요일

전주 임원연수

지난 12·13일, 1박2일 임원연수로 찾은 예향의 도시 전주…


처음으로 찾아가 본 한바탕 전주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경기전(慶基殿) 서편의 종로회관… 급한 허기를 달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전주까지 와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이 종로회관이라니… ㅠㅠ


숙소에서 짐정리 후 저녁에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삼천2동 막걸리골목… 용진집, 두여인, 남도 막걸리 등등 몇몇 업소 중에서 우리가 30분 가량 대기 후 들어간 곳은 ‘복막걸리’집… 5만상 코스를 주문했는데 소문대로 스끼다시 짱~


조합의 기존 행사에 대한 평가, 계획된 행사에 대한 준비와 운영규정 점검 등의 안건으로 밤샘토론 진행…


한옥마을 동편의 치명자산(승암산)에서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 동정부부의 이름을 딴 요한누갈다 한옥게스트하우스(교동 25-10번지)는 쉬어가기 편한 곳이었다.



아침 해장은 1천5백원 모주(毋酒) 한잔에 5천원 전주 콩나물해장국으로 마무리…


2016년 3월 20일 일요일

한반도평화올레14… 화천2코스를 걷다

3월 19일 토요일 오전 8시, 잠실나루역 2번 출구 집결… 한반도평화포럼에서 주관하는 14번째 한반도평화올레길 화천 제2코스를 걸었다.


상서면 노동2리 경로당에서 걷기 시작하여 파소 원앙정에서 한컷 촬영하고, 군데군데 설치된 대전차장애물을 통과하면서 김병준의 ‘산하’를 흥얼거렸다.
♪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길게 누운 이 산하는 여윈 몸을 뒤척이네~ ♬


2013년 6월 첫 걸음을 뗀 한반도평화올레는 우리 모두가 우공(愚公)이 되어 분단선을 걷고 또 걷는다면 마침내 휴전선이 무너지고 말리라는 우공이보(愚公移步)의 신념으로 기획된 평화 프로젝트이다.


1년에 5회, 5년간 모두 24회에 걸쳐 진행되는 평화올레는 서울을 출발, 파주를 거쳐 임진강을 따라 연천을 걸어 철원을 지나 현재 화천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330㎞ 대장정의 마지막 순례(강원도 고성~금강산 구간)는 2018년 1월로 예정돼 있다.



오래간만에 철부지 식구들도 만나고, 씨순길 선생님도 뵙고… 통준사 등 함께 걸었던 분들이 ‘철들지 않은 사람들’이 뭐냐고 많이들 궁금해 하더군.


육군 제7보병사단 상승칠성부대가 관할하는 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금성천 주변의 북녘땅은 작금의 첨예한 남북대치 국면과는 다르게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갈라진 우리 누리는 언제쯤 하나가 될까.

2016년 3월 18일 금요일

전주기행

1791년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전라감영에 이송된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가 참수치명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가 지척인 곳…
명동성당을 설계한 바 있는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통감부에 의해 헐려나간 풍남문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주춧돌 삼아 1914년 완공한 전동성당은 호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꼽힌다.
비잔틴 양식의 종머리와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이 어우러지고, 아치형 천장과 밝은 조명이 신비로움과 경건함을 더해 주는 전동성당은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공양왕 원년(1388) 전라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축성된 풍남문(豊南門·보물 제308호)은 정유재란으로 파괴된 후 영조 대에 관찰사 조현명·홍낙인이 재건하였으나, 신작로를 내겠다는 일제에 의해 헐리고 원형이 훼손된 것을 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현판은 한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豊沛)로부터 비롯된 이름으로 ‘풍(豊)’자는 왕조를 의미하는데, 전주부성의 풍남문(豊南門)과 화성행궁의 신풍루(新豊樓)는 각기 조선왕조의 세거지와 재출발의 거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풍남문은 정면3칸·측면3칸의 1층에 정면3칸·측면1칸의 2층 팔작지붕 주심포 양식인데 반달모양의 옹성까지 갖췄다. 문루 1층 안쪽의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이어올린 건축기법은 우리나라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방식이다.
1894년에는 관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여 전주부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이 풍남문 문루에 나부꼈을 것이다.


호남제일문 풍남문 광장 좌편에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과 같은 형상의 소녀상이 있다. 영화 ‘귀향’의 장면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다.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까지 깊은 연관을 맺는 것임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객사(客舍)란 고려 이후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 또는 객관으로 사신이 내왕할 때 묵던 숙소를 말함이니 전주에만 객사가 있던 것이 아니다.  2010년 문화재청은 전주객사(全州客舍·보물 583호)의 이름을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변경하였는데, 사대(事大)의 냄새가 풍기는 건 왜일까. 현판은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 판액을 썼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전주시는 풍남동 풍남문에서 중앙동 전주객사에 이르는 옛 전라감영 주변 500여 미터 공간에 역사문화의 거리를 조성한다고 한다.


오동나무(梧木)가 많다 하여 오목대(梧木臺)라는 이름이 붙은 곳. 경기전(慶基殿) 동남쪽으로 500m 떨어진 언덕에 위치하여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우왕 6년(1380년)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삼도도체찰사 변안열 등과 연합하여 남원 운봉에서 왜적을 섬멸한 황산대첩 직후 귀경하는 길에 종친들을 불러 모아 승전잔치를 벌이고 한고조의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면서 새 왕조 창건에 대한 의지를 은근히 내비쳤던 곳이다.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고종37·1900)에 고종이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친필로 비석을 세웠다.
오목대 건너 70m 위쪽에는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태생지인 이목대(梨木臺)가 있다.


공민왕 3년에 창건됐다는 전주향교(全州鄕校)는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향교 중 하나로, 평지에 입지해 있어 대성전이 명륜당 앞쪽에 배치된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유교 5대 성인(공자·안자·자사·증자·맹자) 부친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계성사(啓聖祠)로 유명한 곳이다.



승암산 줄기의 혈자리 명당 한벽당(寒碧堂)은 1404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崔霮)이 낙향하여 세운 누각으로, 500년간 전주 선비들의 풍류를 담아왔던 곳이라고.


1931년 10월 일제가 승암산(僧岩山)의 정기를 자르고 전주-남원 간 전라선을 개통하면서 뚫은 한벽굴은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이 남아있는 현장이다.



2016년 3월 15일 화요일

변산반도국립공원 채석강(彩石江)

13일, 임원연수를 마치고 상경하는 길에 들른 변산반도국립공원 내 채석강(彩石江, 전북기념물 28호)…
아무리 둘러봐도 江은 보이지 않는데 江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당나라 시선(詩仙) 청련거사 이태백(李太白)이 술을 마시며 뱃놀이를 즐기다가 강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뛰어들어 익사했다는 중국 채석강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인근의 적벽강(赤壁江)과 함께 변산팔경 중 제6경이자 명승 13호에 해당하는 채석강은 오랜 세월 밀물과 썰물의 움직임으로 독특한 층암을 형성하여 수천수백의 책이나 시루떡을 쌓아놓은 듯 보이기도 하는데, 바닷물이 들어오는 쪽은 억겁의 세월이 만든 자연의 거대한 공구리 현장 같기도 하다.


낙석위험을 무릎쓰면서까지 구태여 안전선 안으로 들어가 못난 면상촬영에 여념이 없는 몰지각한 관광객들만 아니라면 ‘서해안의 진주’라 불리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2016년 3월 9일 수요일

헌인릉 탐방

내곡동 헌인릉(獻仁陵)에서 시작한 2016년 한가람 2월 답사(2016.2.27)…
23대 순조(이공)와 순원왕후 김씨를 합장한 인릉(仁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도(神道)-어도(御道)가 아니라 신도(神道) 대신에 향로(香路)라는 푯말을 붙인 것이 특이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순조는 아버지 정조와 장남 효명세자(익종)의 그늘에 가려 그닥 존재감이 크지 않은 임금으로 기억된다. 순조 대에 김조순을 주축으로 60여 년간의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서북지방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오가작통법 등으로 천주교가 크게 탄압받는다. 순조는 45세에 매독3기로 승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병풍석 없이 12간의 난간석으로 둘려졌고, 건너편으로는 테러방지법 등으로 최근 더욱 세가 강화된 국정원을 발치에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다. 국정원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 헌인릉 근처 어딘가에 다라치고개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3대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인 헌릉(獻陵)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정릉(玄正陵)과 같은 양식에다 석마가 추가됐는데 세종의 효심으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여흥부원군 문도공 민제(閔霽)의 차녀인 여흥 민씨는 두살 연하 남편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집권 후 왕권을 강화하려는 태종의 정책으로 친정 동생들이 유배·사사당하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했고, 남편보다 먼저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각기 병풍석을 두른 두 봉분이 12간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부모님이 서로 화해하기를 바랬던 세종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태종 말년에 전국적인 가뭄이 들었는데, 병석에 누워있던 태종이 “내가 죽으면 하늘에 올라가 상제께 비를 내리시도록 청하여 우리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겠다.”는 말을 남긴 후 5월 10일에 승하하자 정말 비가 내려 해갈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오월 초열흘날이 되면 항상 비가 내렸다고 해서 태종우(太宗雨)라고 하는데, 상석(床石) 밑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헌릉이 위치한 대모산 기슭은 물이 많아 곡장 옆으로 배수로를 뚫어 놓았다. 새봄이 오면 오리나무 숲의 경관이 더욱 볼 만할 것이다.


춘정 변계량(1369~1430)의 비문으로 태종 이방원(1367∼1422)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태종 헌릉 신도비(太宗 獻陵 神道碑, 보물 제1805호)가 웅대하다. SBS 퓨전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카리스마가 발산되는 듯하다.
현재 청량리에 위치한 세종의 신도비를 마지막으로 이후 왕릉에서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2016년 3월 5일 토요일

WE ALL CAN DO IT.

70년대 활약하셨던 김익완 선생님께 간간이 들은 얘기가 있는 터여서 더욱 익숙한 이름…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
3월 5일 오늘은 정말이지 예정된 일정이 빡빡했는데… 유영모·함석헌 선생 묘소참배도, 오대산 선재길 트레킹도 마다하고, 2016 앰네스티 한국지부 정기총회에 참석함. 5호선 영등포시장역과 영등포구청역 사이에 위치한 하이서울유스호스텔은 한 차례 숙박해 본 적이 있기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지.
사업보고·감사보고 등으로 2015년의 활동을 점검하면서, 신규 5개의 안건을 의결하고선 2016년을 이끌어 갈 새로운 임원진을 선출했는데… 11시부터 개회된 총회가 6시가 훨 넘어 마무리됐다. 그나마도 8시까지 진행되는 2부 순서엔 약속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민주성을 추구하다보니 아무래도 다소 비효율적인 것도 사실… 2016년 회원증은 물론이고, 예쁜 디자인의 머그컵까지 기념품으로 받아옴.


‘피해를 입은 사람보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더 분노하는 게 정의로운 사회’라는 의장의 멘트가 새겨진다. 앰네스티의 모든 캠페인에 전적으로 100%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톡에도 친구로 추가했으니…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지.
“WE ALL CAN DO IT” 우리 모두는 할 수 있어!


2016년 3월 3일 목요일

삼일절의 탑골공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자리에 조선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라 개명하고 중건했으나 연산군에 의해 폐사된 후, 고종 34년인 1897년(광무 1년)에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공원인 파고다(Pagoda·동양의 불탑) 공원으로 조성된 자리… 엊그제 97주년 삼일절을 맞아 종로2가 탑골공원엘 갔다.
역사의 아이러니…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쓴 삼일문(三一問) 현판 밑을 통과하여 공원에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것이 팔각정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소위 민족대표라는 사람들은 유혈충돌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탑골공원이 아닌 요리집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자기들만의 독립선언식을 진행하고 총독부에 연락하여 안전하게 자진 연행되어 갔다.
태화관과 300미터 가량 떨어진 탑골공원에서는 약속시간인 2시가 되어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잠시 당황하기도 했으나, 학생을 중심으로 한 수천의 군중들은 팔각정에 오른 정재용(1886~1976) 청년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자체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환호성과 함께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후 운동의 불길은 노도와 같이 전국으로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갔다.
3·1운동 당시의 모습을 담은 10개의 부조가 팔각정 오른편에 늘어서있다.


탑골공원 삼일절 기념식엔 늙은 남자들만 소일했고, 꾀죄죄한 차림의 중년들도 다수 눈에 띠었다. 97년 전 3·1 독립만세의 함성이 처음으로 울려 퍼졌던 저항의 성지엔 냉혹한 현실에 짓눌려 궁핍한 글그막을 보내고 있는 노년들의 무료함과 소외감, 우울과 초라함이 가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