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30일 목요일

굿바이 마왕

더클래식의 발라드 「마법의 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귀(魔鬼)나 요괴(妖怪)로부터 가엽고 아름다운 여인(희생제물·공주)을 구출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는 장르를 불문하고 동서고금에 걸쳐 익숙한 설정이다.
덴마크 설화 ‘마왕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괴테(Goethe)가 쓴 시에 1825년 18세의 슈베르트(Schubert)가 곡을 붙여 가곡 마왕(Erlkönig 에를쾨니히)을 탄생시켰다.
며칠 전 한창 나이에 급작스레 타계한 신해철이 마왕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MBC FM에서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유령국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할 즈음부터라고 한다.

마왕 신해철은 대마초 규제에 대해 좀더 섬세한 통제를 주문했고, 이효리와 같은 퍼포먼스 가수의 립싱크를 두둔했으며, 이명박에 대해서는 (박정희보다는) 전두환의 아바타라고 일갈했다. 우수한 학생은 감당 못하고 떨어지는 학생은 배려 못하는 것이 작금 공교육의 실상이니, 사교육이 무용지물이 되는 환경을 만들지 못할 바에야 공교육은 자취를 감춘 인성교육과 사회화의 서비스를 강화하고 가려운 부분은 사교육이라도 동원해서 긁어주는 것이 현재의 차선책이라면서, ‘사교육=입시지옥을 만드는 절대악’이라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또한 시청률에 일희일비하는 최근의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며, 노래할 땐 록하고 말할 땐 사회적 발언을 가열차게 쏟아낸 소셜테이너(socialtainer)였다. 연예인출신의 정치인을 뜻하는 폴리테이너(politainer)와 분명하게 차별되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론 고교 선배님이기도 한 고인은 1988년 제12회 MBC 대학가요제에 그룹 무한궤도의 보컬로 참가하여 경쾌한 비트의 「그대에게」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후 록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싱어송라이터이자 끊임없는 음악적 변신을 시도한 깨어있는 뮤지션이었다.

어느날 마왕은 많이 아파 여위어진 얼굴 모습으로 힘없이 누워 있다가 차디차게 식어 갔지만, 남은 이들에겐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우리 역시 세상에 머무르는 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과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하는 질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렵고 험한 빗길 속을 걸어서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 다만,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더 이상 도움될 것 없는 현실에서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오면 지나간 세월에 후회 없노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의 문제가 남는다. 얼마나 아파해야 우리 작은 소원이 이뤄질까!

♬만남의 기쁨도 헤어짐의 슬픔도, 긴 시간을 스쳐가는 순간인 것을
   영원히 함께 할 내일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기다림도 기쁨이 되어 ♪

「날아라 병아리」, 「힘겨워 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를 흥얼거려 본다.
굿바이 얄리… 마왕(魔王)의 영면을 기원하며…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2014 도란도란 서울둘레길 걷기 1-1코스 완주

지난주 토요일(10월 18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2014 도란도란 서울둘레길 걷기’ 제 4회차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시간에 임박하여 집결지인 창포원(도봉산역 2번출구)에 도착하였기에 접수를 마치고 노란색 도란도란 팔띠를 차고선 바로 출발하여…
서울 창포원(菖蒲園), 벽운동(碧雲洞) 계곡, 노원 전망대, 동고비 쉼터, 채석장 전망대 등 다섯 포인트마다 스탬프를 받아가며 당고개역 진달래어린이공원까지 서울둘레길 1-1코스 7.6㎞ 수락산길을 걸었다.


딱따구리의 둥지를 이용한다는 리모델링 전문가이자 수락산의 텃새인 동고비(nuthatch)의 고주파 노래소리가 청아했다.
이 녀석의 등이 다른 새에 비해 둥그렇게 굽어 있어서 ‘등굽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동고비가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름의 유래가 있다고 한다.


이 날엔 157㎞에 이르는 서울둘레길 전 구간의 개통(11월 15일)에 앞서 실전 모니터링을 위해 구성된 ‘100인 원정대’ 분들도 함께 걸었는데… 이분들 중에는 체력적으로 준비가 안 된 참가자들이 상당수 눈에 띄어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있을 법도 하다.
인솔자인 생명의숲 활동가를 부지런히 따라가기에 바쁘다 보니 정작 여유롭게 산길을 둘러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다시한번 동 코스를 걸으면서 흐드러진 억새밭과 비오톱(Biotop)도 유심히 살펴보고, 벽운동 일대의 산자락을 오르락 내리락 걸으면서 피톤치드 가득한 삼림욕과 수려한 전망을 즐기면서 녹색이 노랗게 벌겋게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자연의 신비로운 그라데이션을 느껴봐야겠다.

2014년 10월 23일 목요일

건강을 지키는 생활건강 마사지

평생교육사 예순번째 목요모임은 윤영희 체인지피부원장님의 ‘생활건강 마사지’ 강의로 채워짐.
건강에 대한 개념 정의를 시작으로…
건강은 몸 (體), 마음 (仁), 정신 (智)의 체인지 3박자로 구성되며…
건강관리에는 마사지를 포함하는 자연요법도 꽤나 유용하지만, 무엇보다 개개인의 생활습관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함.


이밖에도 음용은 뜨거운 물에서 찬물의 순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음양오행도를 통한 장기의 특성과 기능, 눈 수영 운동을 실습하는…
이 나고 글게 하고 망을 주는 유익한 강의였음.
말씀대로 ‘1주일(7일)에 3회 이상 하루 30분은 운동하자’는 7330운동을 생활화해야 함.
오늘 강의는 내부 사정으로 다소 짧아졌는데, 조만간 다시 한번 모셔야겠음.


2014년 10월 22일 수요일

도메인 네임으로 IP주소 찾는 법

도메인 이름으로 IP 알아내기

도메인 네임은 아는데  ip주소를 모를 경우에는…
 ‘nslookup 도메인 네임’을 입력하거나, 간단하게  ‘ping 도메인 네임’을 입력하면 ip 주소를 알 수 있다.

nslookup은 도메인 이름과 IP 주소를 확인하는 기능을 가진 네트워크 관리 명령 줄이다.
nslookup 명령은 콘솔(윈도우 도스실행창 cmd)에서 인터넷 도메인 네임 서버(DNS Server)를 조회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nslookup inplaza.com 하면 인플라자닷컴(inplaza.com)이 이용되고 있는 서버를 알 수 있다.(www는 생략해도 무방)


명령 프롬프트에 ‘help’나 ‘?’를 입력하면 사용할 수 있는 명령 목록이 나열된다.


Hostname만 알고 IP를 모를 때 IP를 확인하는 또다른 방법은… ping 명령어이다.
ping은 Packet Internet Groper의 약자로, 컴퓨터 네트워크 상태를 점검·진단하는 가장 간단한 명령어이다.
아래와 같이 command 창 접속 후 ping hostname로 확인하면 Reply from ‘Server ip’로 나온다.


ping 명령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ping /?’이라 입력하면 볼 수 있다.(ping과 슬래쉬 사이에 공백)


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2014년도 하반기 서울 한양도성탐방

한양도성연구소가 실시하는 하반기 한양도성탐방을 3회차에 걸쳐 소화했다.
참가자격은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http://yeyak.seoul.go.kr) 시스템을 통해 선발된다.
한양도성박물관 → 낙산 → 혜화문을 걷는 1코스(동대문역 1번 출구)와 흥인지문 → 청계천 오간수문 터 → 이간수문→ 동대문역사관 → 광희문까지의 2코스(동대문역 6번 출구), 남산(일부) → 박문사 터 → 흥화문 → (장충단공원) → 수표교 → 장충단비에 이르는 3코스(동대입구역 4번 출구)를 모두 탐방 완료했다.
개인적으로는 낙산구간의 풍광이 가장 좋았다.



암문(暗門)은 성곽의 대문과 대문 사이에 위치한 작은 사잇문으로 성곽에서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비밀통로이다. 암문은 물자공급이나 척후 등 여러 효용성이 있음에도 방어상의 어려움 때문에 최소한도로 설치되었다. 현재 한양도성에는 8개소의 암문이 있다.


한양도성의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은 축조시기마다 다르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다. 1396년 태조 때에는 1월과 8월, 2차례 공사를 통해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다. 성돌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쌓고 사이사이에 굄돌을 놓았다. 1422년 세종 때에는 1월에 도성을 재정비하면서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1704년 숙종 때에는 성돌의 크기를 40~45㎝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하여 무너진 구간을 수차에 걸쳐 새로 쌓았다. 1800년 순조 때에는 60㎝ 가량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인 것이 특징이다.



한양도성은 태조5년(1396년) 초축된 뒤 세종4년(1422년)·숙종30년(1704년)에 대규모로 개축됐고, 영조·정조·순조·고종 연간 등 600년간 보존·관리돼 왔다. 답성을 하다보면 구간마다 책임자 및 석공의 이름과 연대, 축성구간 등을 새겨 놓은 각자성석(刻字城石)을 보게 되는데, 공사실명제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크다.
예를 들어 「홍산시 鴻山始」는 1422년(세종 4)에 충청도 홍산(鴻山)의 군정(軍丁)들이 성벽 수축을 시작한 지점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이 지점부터는 홍성사람들이 축성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오랜 세월 동안 풍화 등으로 마모가 심해 글자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잊혀지지 않도록 알림판 같은 것을 설치하면 좋을 것 같다.


한양도성탐방 프로그램의 아쉬운 점도 있다. 평일 낮시간이어서 탐방객이 아무래도 주부층에 한정될 소지가 있고 북악산과 인왕산 구간이 빠져있는 맹점을 보완한다면 선조들의 숨결이 녹아있는 600년 한양도성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히 유익한 공익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밋밋한 미팅

중등부 고등부 모두 중간시험이 마무리됐다.
하여 그동안 시험대비로 고생한 녀석들과 meat meat한 meeting을 가졌다.


희망자에 한해 학년별로 조를 짜고 불판, 버너, 밥, 김치, 음료 등 준비물을 분담하고 학원에서는 삼겹살을 제공하고… 해서 강의실이 일일 고기집으로 변신했다.
meat meat한 meeting(밋밋한 미팅)이니 언어유희가 되나.
모두들 배불리 먹고 마시고 수다 떨고… 아이들이 다들 이뻐 보인다.
오늘 17일 금요일인데… 칠판에 적어놓은 날짜가 잘못됐네 ㅋㅋ
치열한 경쟁을 요구하는 교육현실은 참교육이라는 이상과는 정말 많이 다르다. 이놈들과 생활하면서 가르치는 자의 역할에 대해 참으로 많이 고민하며 배우고 있다. 걸핏하면 척결의 대상으로 매도되고 있는 현재의 기형적인 사교육 시장은 결국 공교육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끔은 新맹모를 자처하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극성 학부모 등살에 힘겨울 때도 있지만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이 일에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성희롱(性戱弄)

제59차 평생교육사 목요회는 정선옥 선생님의 ‘우리가 모르는 성희롱’ 강의로 진행됨.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접대의 도구로 취급하는 문화는 윤창준 전 청와대 대변인, 박희태 전 국회의장, 송유진 17사단장 등과 같은 사회지도층에서 콜센터에 1만번이나 전화걸어 상담원을 성희롱했다는 개저씨까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강의에서는 먼저 성폭행·성추행·성희롱을 개념 구분하고, 구체적인 성희롱 사례를 통해 현황을 제시한 후 예방과 대처방법을 알아보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성희롱의 성립 요건은 업무와 관련한 것인지, 근로조건에 불이익이 있었는지, 유무형의 압력을 받았는지, 피해자가 성적 굴욕감을 느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성희롱 문제는 근본적으로 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배려와 관련된 문제로써 피해자 중심주의로 이해되어야 하며, 노골적인 성희롱 발언은 명백한 범죄행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가부장제, 이중적 성의식, 차별적 성의식, 성희롱 사각지대의 비정규직 여성, 양성평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주제였는데,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신 정선옥 선생님… 애쓰셨습니다.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수니파 vs 시아파

이슬람 공동체는 632년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숨지자 그의 친구인 아부 바크르를 지도자로 삼아 칼리프(Caliph)라고 불렀다. 칼리프는 무함마드를 잇는 ‘계승자’라는 의미로,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이면서 정치적 지배자 역할을 하였다. 2대 칼리프 우마르는 비잔틴 제국의 반격을 물리치고 이슬람 세계를 확장했고, 3대 칼리프 우스만은 이슬람 경전인 ‘꾸란’을 정리했다. 4대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며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인 알리였다. 이에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이 속한 우마이야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661년 알리를 암살하고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칼리프가 되어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정하고 칼리프 자리를 우마이야 가문에서 물려받도록 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무함마드의 순나(관행·범례)를 따르는 사람들을 뜻하는 수니(Sunni)는 협의를 통해 선출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4명의 칼리프를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했다. 반면에 알리 시절 생겨난 시아(Shiah)는 ‘분파’라는 뜻으로 무함마드 일족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후계자를 이맘(Imam)으로 부르며 칼리프와 구별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만을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681년 알리의 차남 후세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암살당하면서 수니파에 대한 시아파의 원한은 커져갔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고 화폐를 통일했다. 서쪽으로 크리스트교 국가들과 대립하며 이베리아 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투르·푸르티에 전투에서 패배하여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물러났다.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월주의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란 지역으로 도피해있던 시아파를 등에 업고 군사를 일으켜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세웠다(750).


수니파
시아파
경전
꾸란
지도자
자격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선출
무함마드의 자손만이 후계자
이맘
(이슬람 교단
지도자)
종교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
+ 무함마드의 승계자이자 절대적 권위를 갖는 최고 성직자
기도 방식
가슴이나 배에 손을 엇갈려 얹은 채 기도
손을 옆구리 옆에 두고 기도
분포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다수파
전체 이슬람교도의 20%(수적 열세)
왕조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국가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 예멘, 레바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대부분 국가에서 다수 종파
이란과 이라크 등에서만 다수 종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시아파가 정국주도권을 잡아온 이란(중동의 유일한 시아파 국가)과는 달리,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 종파임에도 사담 후세인 정권처럼 수니파가 줄곧 정권을 잡으면서 시아파가 박해를 받았다.
이란은 지정학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시리아를 통해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친서방 성향의 온건 수니파 중동국가들과 대립해 왔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도 계속해서 세를 불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1400여년에 걸친 수니파와 시아파간의 대립과 계파 간 권력다툼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세계정책에 의해 한반도의 정세는 항상 중동 사태과 맞물려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오간수문, 이간수문

한양도성에는 수문 2개소가 있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은 내사산(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에서 모여든 물이 청계천을 이룬 뒤 도성 동쪽 밖으로 나가는 곳에 만들어진 다섯칸 수문이다.
흥인지문과 광희문을 연결하는 성곽을 축조할 때 청계천을 가로질러 성을 쌓는 난공사를 해결하기 위해 5개의 아치형 수구(水口)를 내어 물이 흐르게 하고 그 위로 성곽을 얹어 연결한 것이다.
일제가 한양도성을 해체하면서 오간수문(五間水門)도 헐려졌는데,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의 오간수문은 벽면에 그림을 그려넣은 이미테이션에 불과하다. 서울시와 문화재청 등 관련 기관이 협의하여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하기를 희망한다.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짓는 과정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원형의 모습을 되찾은 이간수문(二間水問)은 목멱산에서 북으로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청계천과 합류하기 전에 도성으로 빠져나가는 지점에 위치한다.
석축 높이는 4m 남짓이며, 수문은 2칸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한칸의 너비는 3.3m 정도이고, 3m 이상의 화강암 석재를 가공하여 축조되었다.


치성(雉城)은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내밀어 놓은 부분으로 방어 상 취약한 곳에 축조된 방어 시설물이다.
문헌에는 도성에 모두 4~6개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전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예가 없었다. (구)동대문운동장 부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치성의 존재가 최초로 확인되었다. 치성부의 규모는 남북 10.2m, 동서 8.3m로 평면형태가 방형이다.


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2014 빈민사목 합동행사 체육대회

어제는 서강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2014년 서울대교구 빈민사목 합동 체육대회’에 다녀왔다.



임용환(엘리아) 신부님이 집전한 10시 주일미사 참례를 시작으로 준비운동을 마친 후, 봉천3동·장위1동·금호1가동·삼양동 선교본당·독립문공동체·새빛평화의 집·명례방협동조합 등의 참여 공동체를 청팀과 백팀으로 편을 나누고 청색과 노란색의 리라이퍼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리라이퍼(RELIFER)는 ‘다시(Re) 삶을(Life) 살아가는 사람(-er)’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맛있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나누어 먹고…
풍선 볼링, 링 던지기, 배틀 훌라후프, 공 굴리기, 도전 천곡 등… 위험하지 않게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종목들이 진행되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교황청 회칙에 부합하고, 무엇보다 빈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를 지향하는 이들의 소소한 하루였다.(Photo by 일속산방)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고대 무덤양식

우리나라 고대 삼국의 무덤은 시기별·지역별로 다양하다. 무덤의 축조재료에 따라 흙무덤과 돌무덤, 시신을 안치한 위치에 따라 지하식과 지상식, 매장방법에 따라 구덩식(수혈식)과 굴식(횡혈식)으로 나뉜다.


움무덤(토광묘 土壙墓)은 구덩이를 만든 뒤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는 지하식 무덤으로 가장 일찍부터 널리 사용된 방식이다.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확인된다. 시신을 널에 넣어 움에 묻은 것을 널무덤, 널을 덧널 안에 넣고 움에 묻은 것을 덧널무덤이라고 한다. 서울 인근과 한강 이남에서는 주위에 도랑을 두른 움무덤도 다수 확인되었다.

흙무지무덤(분구묘 墳丘墓)은 땅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묻는 지상식 무덤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시신을 추가로 묻어 봉분이 점점 커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하나의 봉분 안에 둘 이상의 시신을 묻은 무덤을 흔히 다장묘라고 한다. 가락동1·2호분, 석촌동파괴분, 석촌동5호분, 김포 운양동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돌무지무덤(적석묘 積石墓)은 땅 위에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묻은 지상식 무덤이다. 돌무지무덤은 고조선시대부터 만들었으며, 고구려에서는 초기부터 오랫동안 왕릉으로 사용되었다.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무덤처럼 봉분 전체를 돌로만 쌓은 순수한 돌무지무덤(석촌동3호분)과 함께 봉분 안을 흙으로 채춘 후 돌을 쌓은 돌무지무덤(석촌동2호분, 석촌동4호분)도 만들었다. 석촌동3호분은 동서 길이 50.8m, 남북 길이 48.5m의 규모로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돌무지무덤이며 한성백제 전성기의 왕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은 평면은 기본적으로 네모모양이며, 축조방식에 따라 무기단식·기단식·계단식 등으로 나뉜다. 가장 완성된 형식의 돌무지무덤으로 꼽히는 중국 지안(集安)의 장군총은 계단식이며 한 변의 길이가 31m 내외의 정사각형모양이다. 압록강 중·하류 일대에는 수천 개의 돌무지무덤이 분포하여 고구려 지배층의 공동묘지이다.


돌덧널무덤(석곽묘 石槨墓)은 긴 네모모양의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덧널시설을 만든 다음 나무널을 넣고 돌을 덮는 구덩식 무덤이다. 청동기시대에 출현하였으며, 신라·가야지역에서 많이 만들었다. 백제에서는 대개 3세기 이후에 확인된다.

돌방무덤(석실묘 石室墓)은 돌로 방을 만들고 한쪽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출입시설인 널길을 만들어 추가장이 가능한 무덤이다. 부부를 비롯한 가족합장 무덤으로 유리해서 삼국시대 후기에 대표적인 무덤이 되었다. 백제의 돌방무덤은 고구려·신라와는 달리 산의 경사면에 땅을 깊이 파고 만들어서 봉분이 낮은 것이 특징이다. 한성기 돌방무덤은 평면이 네모모양으로 배가 부르게 완만한 곡선을 띠는 것과 직선을 띠는 것이 있으며 널길은 주로 우측에 있으나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라의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묘 積石木槨墓)은 잔돌을 깔고 덧널과 널을 설치한 뒤 돌을 쌓아 덮고 다시 흙으로 봉분을 만든 무덤이다. 독특한 축조방식으로 인해 무덤규모가 크고 도굴이 쉽지 않기 때문에 발굴조사 결과 금관·금귀걸이 등의 화려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지배층 무덤으로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 있다.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꺼림칙한 페이스북

○○님, 친구의 새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이○○, 최○○, Cholsoo Kim님을 아세요?
10님, 사람들이 회원님과 대화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님, 사진 태그 1개이 있습니다.
윤○○님과 정○○님이 Facebook에서 페이지를 팔로잉합니다.
박○○님이 회원님과 Facebook 친구가 되고 싶어합니다.
홍○○님이 사진을 공유했습니다.
조○○님이 휴대폰 업로드 사진첩에 새로운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님, 새 알림 1개 - 확인해주세요

새로운 알림이 있습니다.
지난번 로그인하신 이래 Facebook 상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놓치신 친구들의 알림 중 일부를 보여드립니다.

……
……

일주일에도 몇번씩 날아오는 페이스북 메일 제목들이다.

그럼에도 오랜동안 로그인을 하지 않았더니 최근에는
“○○님, 안녕하세요! 회원님이 관심있으실 만한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라는 제목으로도 온다.
집요한 넘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이름과 학교 정보를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이용자의 절반 정도를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주민번호 없이도 유저의 이름·성별·혈액형·지역·출신학교·직업·친구·관심사 등의 개인정보가 너무도 쉽게 노출된다.
쿠키 분석 등 복잡한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의 감정까지 조정할 수 있는 섬뜩한 넘들이다. 벨이 울리면 반사적으로 위액을 분비하는 파블로프의 실험동물이 연상되지 않나. 마크 저커버그에게 나와 지인들의 근황을 보고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탈퇴할 시점이 됐다.
국정원 등 국가기관에서 패킷감청하고 있다는 카카오톡이나 밴드 역시 자유로울 순 없지. 이래저래 사이버 검열이 횡행하는 빅브라더의 시대다.

2014년 10월 7일 화요일

수원화성 씨순길

10월 4일 토요일 오전 10시, 1호선 수원역 1번출구 집결…
팔달문(八達門)에서 시작한 씨알순례는 화성행궁(華城行宮)과 화성성곽길을 걷는 코스였다.



화성행궁의 느티나무(zelkova)는 600년 이상된 노거수로 화성 성역 이전부터 수원을 지켜온 신령스런 나무인데 높이는 30m, 둘레는 6m에 이른다. 영목(靈木), 신목(神木), 귀목(貴木)이라고 불려왔으며 예부터 잎이나 가지를 꺽으면 노여움을 사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였다. 또한 소원지(所願紙)에 소원을 적어 걸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1982년 경기도 보호수 5-3으로 지정되었다.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正堂)인 봉수당(奉壽堂)은 평상시에는 수원유수부(한양을 방위하는 거점도시의 역할을 하였으며, 현대의 광역시 규모)의 동헌(동쪽의 건물)으로써 유수(현대의 도지사급)의 집무처이자 임금 행차시 정전(正殿)으로 쓰인 곳이다.


을묘원행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789(정조13) 9월 25일 완공되었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규모로 증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1795년(정조19) 윤 2월 13일 화성행궁에서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성대하게 벌어졌다. 서울의 궁궐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려하고도 기품있는 궁중 연회가 이때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연행되었다. 헌선도·몽금척·하황은·포구락·무고·아박·향발·학무·연화대·수연장·처용무·첨수무·검무·선유락 등의 궁중 연희 종목들이 회갑잔치의 화려함을 장식하였다. 사진은 이때 연행된 궁중 연희 중에서 무고와 선유락 연행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선유락(船遊樂)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채색을 꾸민 배를 가운데 놓고 여러 기녀들이 닻줄을 끌고, 배를 감으며 추는 춤이다. 봉수당 앞 오른쪽에 정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앞뜰엔 혜경궁의 친척들인 의빈과 척신들이 앉아있다. 봉수당의 섬돌에 놓인 헌선도(獻仙桃)를 비롯해 앞뜰에 놓인 화려한 소품들이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움과 품격을 한껏 나타낸다.


장락당(長樂堂)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를 위해 1794(정조18) 화성축성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장락당과 봉수당의 두 건물은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며,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 복원되었다.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1790년(정조14)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1794년에 증축되었다.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복내당에 딸린 부엌 살림을 통해 수원부 유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의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남아있지 않으며 1997년에 복원된 것이다.


1790년(정조14)에 건립된 은약헌(隱若軒)을 1796년(정조20) 증축하면서 유여택(維與宅)으로 이름을 바꿨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다가, 임금이 행차하게 되면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곳으로 이용되던 건물이다.
1795년(정조19) 행차 때, 정조는 이 건물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이다.


낙남헌(洛南軒)은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한 행사용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득중정을 노래당(老來堂) 옆으로 옮겨 짓고, 그 터를 넓혀서 1794년(정조18)에 완공하였다.
화성행궁 부속 건물 중에서 파괴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건물이다.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위해 배를 여러 척 띄어 놓고 그 위에 나무판을 가로질러 연결한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득중정(得中亭)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하였다.


장대(將臺)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19) 윤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노대(弩臺)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노대(西弩臺)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을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雉城)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포루(鋪樓)는 성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이다.
적대(敵臺)는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이다.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만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한 북서적대(北西敵臺)의 높이는 성벽과 같다. 치성 밖 아래쪽에 성 아래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3개의 현안(위아래로 길게 낸 구멍)을 만들었고, 쌓은 담장마다 총안(총구멍)을 내었다.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1964.9.3)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거중기(움직도르래)와 녹로(고정도르래)가 공기를 단축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속이 비어 있는 돈대’라는 의미의 공심돈은 내부가 비어 있어 군사들이 그 안에서 계단으로 올라 다니면서 적을 향해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화성의 5개의 암문 중에서 북암문(北岩門)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동북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으며 1796년(정조20) 3월 27일 완공하였다.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낸다. 다른 4개의 횃불구멍은 긴급한 일이 없으면 올리지 않았다.
봉수(烽燧)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전하는 군사신호 체계이다. 총 5개의 횃불구멍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남쪽 첫 번째 횃불구멍부터…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 적이 국경근처에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선에 도달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침범하면 봉수 4개, 적과 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올렸다.

1997년 유네스코는 ‘화성은 뛰어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건축물의 모범이며, 성곽의 여러 건축들이 각각 예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라고 평가하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