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오전 10시 10분, 중앙선 운길산역 2번 출구 집결… 초하(初夏)의 강바람을 타고 남북 한강이 만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7㎞의 강변길을 걸었다.
북한강은 강원도(북한) 금강군에 있는 옥밭봉(1,241m)에서 발원하여 춘천을 지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만나는 길이 371㎞의 강이고…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금대봉의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해 정선에서 오대천을 만나 남쪽으로 흐르다 영월군에서 평창강, 충주에서 달천, 여주에서 섬강 등과 합류하는 514.4㎞의 큰 강이다.
이 두 강이 두물머리 즉 양수에서 만난다. 운길산역에서 옛 철길(지금 자전거길) 건너 섬이 곧 두물머리이며 이 섬 남단에 서면 지척에 다산유적지가 있다. 6월 씨순길의 끝점은 몽양 여운형의 생가이다.
10:20 운길산역 - (2㎞) - 11:00 양수역 - (4㎞) - 12:30 신원역 - (0.5㎞) - 12:40 몽양기념관 - (0.5㎞) - 13:30 신원역(약 7㎞) - 점심: 신원역 앞 황금어장(☎ 031-772-6859)
중앙선 신원역에서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몽양 유객문(夢陽 留客文)을 시작으로 여운형 선생이 남긴 뜻 깊은 말씀을 새긴 16기의 어록비가 배치되어 있다. 몽양어록길의 어록 몇가지를 소개한다.
“여러분은 담배를 피우며 노예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담배를 끊고 자유롭게 살겠습니까! 담배는 나라를 되찾은 뒤 다시 피울 수 있으나 빼앗긴 나라를 찾을 기회는 쉽게 오지 않습니다.” - 1908년 양평 장터에서 <국재보상운동> 연설 중
“나는, 청년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좋아합니다. 무릇 청년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불가슴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권투경기 개회사 중
“제군들은 비록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1936년 손기정 등 베를린 올림픽 출전선수 환송회
“나는 연합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즉 만났으니 “How do you do?”라고 인사할 것이고, 둘째는 “Thank You!”라고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 것이고, 셋째로는 “Goodbye”가 있을 뿐이다.” - 1945년 ‘신조선 건설의 대도’ 중
“전쟁 후 군수공업을 통하여 폭리를 취한 독점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이는 악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평화가 수립되어 세계경제가 안정이 되면 후진국의 농공업이 발달됨에 따라 얻어지는 이익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 1947년 7월 서거 당시 지녔던 수첩 메모 중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은 1886년 양평군 신원리 묘골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치마 폭으로 태양을 안는 태몽을 꾸었다하여 몽양(夢陽)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숙종조에 함양 여씨가 양평에 입향하면서 영회암(永懷菴)이라는 택호가 붙었는데, 2011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몽양 선생은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위원장을 맡았는데 보름이 채 못되어 전국에 145개의 지방위원회들을 조직할 정도로 전국의 치안과 행정을 장악함으로써 과도기의 혼란을 방지했다. 이는 일제 말의 사전 준비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여운형에 대한 민중의 신뢰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몽양 선생은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독립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12차례의 테러를 당한 끝에 한지근이 쏜 총탄에 순국하게 된다(향년 62세). 서거 당시 입고 계시던 혈의가 애처롭다. 현재 선생은 강북구 수유동 순국선열 애국지사묘역에 모셔져 있다.
2004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사한 이후에도 몽양 선생에 대한 서훈은 국가보훈처의 심사에서 탈락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2005년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며 삼일절, 광복절, 순국선열의 날 등 3번에 걸쳐 130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포함, 500여 명의 국가유공자와 독립운동가에게 서훈이 추서되는데…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는 국가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에서 극우세력의 반발 등으로 서훈 2급인 대통령장이 추서된다. 그리고 2008년 참여정부의 마지막 날… 노무현 대통령은 몽양 선생에 대한 훈장의 격을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으로 높여 다시 추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한다. 위 사진의 대한민국장은 노 대통령이 몽양 여운형 선생의 명예회복과 예우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결과인 것이다.
전시실 중앙에 동으로 제작된 몽양 선생의 좌상이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선생님 옆에 앉아서 함께 책을 읽는 모습으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 도산 안창호 선생님과 한 컷… 몽양은 도산의 시국강연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전시실 내 크로마키 시스템을 이용한 포토존에서 스크린에 비치는 18매의 사진 중 원하는 사진을 골라 몽양 선생과 기념사진을 찍고 안내 데스크에서 입장티켓을 제시하여 출력받을 수 있다. 내가 고른 사진은 1936년과 1944년의 사진인데… 몽양 선생님, 도산 선생님과 함께 촬영할 수 있는 정말 영광스런 시간여행이었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묘골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몽양생가(夢陽生家)는 함양 여씨가 양평에 입향한 1715년(숙종 41년)에 처음 지어졌다. 1886년 출생해서 1908년 부친 탈상을 끝내고 서울로 이사갈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으며, 해방 전후인 1940년대 초중반에도 종종 내려와서 지냈다. 선생이 떠난 후 점차 퇴락하여 바깥채 지붕이 초가로 변경되었다가 6·25 전쟁 와중에 소실되었는데. 2001년 양평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터가 정비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서거 64주년인 2011년 복원되었다.
집은 기역자의 기와집 안채와 역시 기역자의 기와집 바깥채로 되어 있고, 안채는 돌층계 위에 자리 잡았으며 뒷마당에는 디딜방아가 있다. 안채 방안에는 몽양 선생이 하얀 내의 차림으로 앉아서 면도하는 모습의 모형이 설치되어 있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집안에 전시된 가구들은 1930년대 이후 선생이 살았던 서울 계동 집에 있던 것들로 후손들이 기증한 것들이다.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夢陽呂運亨生家·紀念館)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2011년 11월 27일 개관했다(경기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 66). 입장료는 성인이 1천원이고(단체 8백원), 65세 이상 노인이나 국가유공자 등은 무료입장할 수 있다.
신원역 맞은편 황금어장에서 초계국수에 막걸리 한잔.
이번 씨순길은 내가 추천드린 코스인데… 언제나처럼 현장답사와 모든 준비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해주신 얼줄 김승주 선생님께 무한 감사드린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해방공간에서의 여운형 노선은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장본인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사자후의 웅변가로만 기억해서는 온전히 몽양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