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8일 금요일

[책]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평생교육사 제15차 모임… 2번째 지정도서 독서토론.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생일상을 받으러 역귀성한 만 71세 엄마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시작한다.
이야기는 1장은 큰 딸, 2장은 큰 아들, 3장은 남편, 4장은 엄마 본인 그리고 에필로그는 다시 큰 딸의 시점으로 전환되면서 전개된다.
아무도 모르지만 오랫동안 누적된 두통으로 인해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글을 읽을 줄도 모르던 엄마는 결국 죽어서 새가 되어 작은 딸의 집과, 평생 숨겨왔던 마음의 의지처인 곰소의 그 남자네 집과, 남편과 아이들 고모가 있는 고향집과, 마지막으로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진뫼 산골 엄마의 엄마집을 차례로 순례하며 이승과의 작별인사를 나눈다.


새드엔딩을 짐작케 하는 4장을 읽으면서 어찌할 수 없는 한(恨)과 슬픔을 내재한 옛 가요들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화자는 읊조린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김소월 역시 『초혼』·『접동새』를 통해 절규한다. “의붓어미 시샘으로 죽은 후 아홉이나 남아되던 오랍동생을 차마 못잊어, 남 다 자는 야삼경 깊은 밤에 이산저산 옮아가며 슬피우는 아우래비 접동이 되어버린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우리 누나.”

소눈 같은 눈과 50년 노동에 찌든 검버섯 퍼진 손등과 파인 상처를 발등에 지닌 채 파란 슬리퍼를 끌고 거지꼴로 큰 아들이 처음 근무했던 동사무소와 처음 장만했던 집으로 허망한 발걸음을 옮기는… 공중에 산산히 부서지고 헤어진 이름이 되어버린 그 이름 ‘엄마’
늘 당연한 존재로 각인되어 소홀할 수밖에 없는 엄마여서, 우리는 “엄마를 모른다.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것밖에는.”
사실 엄마는 실종되기 전에 이미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육적의 회귤고사가 달리 나온 것이 아닐터. 한번 가신 엄마는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정말로 참말로 “엄마한테 잘하자!” 엄마 역시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니었으며,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자이며 인간이라는 것을 눈물로 고백해 보자. 엄마와 무엇을 함께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보자.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고영배 선생님의 ‘현명한 금융소비자’ 교육

평생교육사 14차 스터디 모임.
20여년간 삼성자산운용, 동양증권 등에서 펀드매니저 및 애널리스트로 활동해 온 바우아빠 고영배 선생님의 재능기부 강좌 ‘올바른 금융소비자’ 교육시간.

① 금융(상품)의 변천/진화
② 대두되는 문제점들
③ 노후문제와 현재의 금융시스템
④ 공포마케팅에 대처하는 방법


이제는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30년 넘게 일한 뒤 은퇴해도 무려 30~40년간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하므로 은퇴 설계 역시 일찍부터 서둘러야 적은 부담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다.
은퇴준비가 미비하지만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버부머들 712만여명의 퇴직은 이미 본격화하고 있다. 은퇴를 시작한 이들은 돈을 모아놓기는커녕 빚에 시달리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특히 홀로 사는 노인 열에 여덟은 여성으로, 여성은 남편과 사별하고 평균 9년을 혼자 살아야 하는 ‘할머니 리스크’가 심각한 수준이다. 남편은 자신이 죽고난 뒤의 아내까지 챙겨야 하는 셈이다.
재무적 측면에서 은퇴설계란 ‘산(産)테크’를 잘하는 것이다. 자산을 불려가는 방법이 재테크라면 불린 자산으로 고정적 수입을 만드는 것이 산테크다.


만성적인 저금리·저성장·저출산·고령화 등에 대한 해법은 이미 일본의 사례로 나와 있다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온통 고민거리 투성이다. 단순한 부자 따라하기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결국 디플레이션 하에서는 꾸준한 저축으로 버티면서 과도한 지출(소비)를 줄여야 어느정도 길이 보일 것이다.
대한민국 상위 1%는 ‘절세전쟁’ 중이라는데… 나도 세금(절세) 걱정 좀 하고 살고 싶다.

2013년 6월 22일 토요일

불암산행

점심을 챙겨 먹고 간만에 불암산으로 고고씽~
불암산 공원 언덕 입구에서부터 쉬지 않고 질렀더니 불암정까지 대략 25분 소요.
요사이 날마다 쉼없이 달려서인지 에고에고 요까짓 등반에도 헉헉거리는 꼴이란… 한심이 만만이로소이다.



불암정(佛岩亭) 주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고국을 바라보며 충정한 마음으로 소회를 읊은 시 네수가 새겨져 있다.

「재본법사문종사회」(일본 본법사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야회」(회포에 잠기며)
「재마도몽도한강각이작」(대마도에서 한강을 건너다 깨면서)
「청송사」


노원평(蘆原平) 전투 - 1593년 3월
1592년 임진왜란…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진격하기 위해 북진을 계속하던 왜군은 평양성 전투와 행주전투에서 대패한 후 한양성에 집결하였다. 보급로가 차단된 왜군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근 양주, 양평으로 기동하게 되고 이러한 첩보를 입수한 양주목사 겸 경기도방어사 고언백 장군과 사명대사는 왜군들의 이동로인 노원평, 수락산, 삼각산 등 중요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켜 유격전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왜군은 전투의지가 꺾여 남쪽으로 철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원구에 살면서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군.


불암산(佛岩山)의 전설
전설에 의하면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던 산이라고 한다. 어느날 불암산은 조선왕조가 도읍을 정하는데 한양에 남산이 없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남산이 되고 싶어 금강산을 떠나 한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불암산 자리에 도착하여 보니 한양에는 이미 또 다른 남산이 들어서서 자리 잡고 있었다. 불암산은 한양의 남산이 될 수 없었기에 금강산으로 되돌아갈 작정으로 뒤돌아 섰으나 한번 떠난 금강산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돌아선 채로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불암산은 서울을 등지고 있는 형세이다.

정상까지 찍고 싶었지만, 빗방울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지기에 후다닥 하산함.
헌데… 나무 계단에서는 사용하지 말라는 등산스틱을 꿋꿋하게 찍어대는 인간들은 뭔놈의 심뽀들이냐.

2013년 6월 16일 일요일

충숙근린공원 이상길 묘역

노원구 한글비석로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문신 충숙공 이상길의 묘역.
차를 타고 무심히 지나치기만 하다가 오늘에야 한걸음 들러봄.


촬영한 안내문 사진의 글씨가 작아 보이지 않으므로 안내문의 내용을 아래에 옮겨 적는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강도사직을 수호하다 순절한 충신 이공 휘 상길(1556~1637)과 선고인 찬성공 휘 희선(1530~1592) 그리고 백씨 평사공 휘 상철(1552~1594)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공의 호는 동천(東川)이요 시호는 충숙(忠肅)이고 관은 벽진(碧珍)이니 시조는 고려삼중대광개국 원훈 벽진장군 휘 총언인데, 공이 22세손이며 청백리로 청사에 빛나는 평정공 휘 약동의 5대손이다.
공은 명종 11년(1556) 병진 12월 3일 자시에 한양 주자방에서 태어나고 선조 18년(1585) 을유 9월에 식년 문과 갑과에 제2등으로 백씨인 평사공 휘 상철과 함께 급제하였다.
공의 관직은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대광보국ㆍ숭록대부ㆍ의정부 좌의정 겸 영 경연감춘추관사에 증직되었다.
공이 인조 15년(1637) 정축 1월 26일 사생취의하여 묘사를 수호하다가 순절하니 향수 82세에 영예의 생을 마쳤다.
2월에 선원촌에 권장하였다가 그해 4월에 이곳으로 반장되었으며 부조의 명을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예손들이 봉향하고 있다.
공의 신도비명은 성균관제주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찬하였으며 성균관제주 동춘 송준길이 쓰고 예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문곡 김수항이 전하였다.
이 신도비는 1988년 4월 20일자로 서울특별시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고 영정은 공이 80세 때에 화가 김명국이 두폭을 그려 한폭은 남원덕과에 보물 제792호로 지정되고 또 한폭은 서울특별시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각각 충영각에 봉안되어 있다.


사당인 동천재(東川齋)의 모습.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동천재 뒤편으로는 이상길의 영정을 모신 충영각(忠影閣)이 있다.


묘역 앞 신도비와 앞쪽 우측의 하마비 뒤편으로 선산이 조성되어 있다. 현종 2년(1661)에 화강석으로 제작된 3.16m의 신도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팔각 지붕돌을 얹은 조선 중기의 양식이다.
신도비(神道碑)는 임금이나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고, 하마비(下馬碑)는 종묘나 궐문 또는 문묘 앞에 세워 놓은 비석으로, 하마비가 서 있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이다.



이상길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80세의 노령에도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다가 이듬해 1월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아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목을 매어 순절하였다.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천집」이 있다.

 

2013년 6월 15일 토요일

조선의 정치와 정약용의 『목민심서』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는 다산 경세학(정치사회학)을 대표하는 주저들이다.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신아구방: 新我舊邦) 다산이 내놓은 『경세유표』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넘어 장구한 시간 동안 존속 가능한 ‘신국가건설’ 기획안을 담은 것이다. 『경세유표』는 표면상 복고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특정한 사대부의 발호 그리고 군왕의 정치전횡을 막기 위해 철저하고 치밀하게 고안된 정치체제, 공적인 관료제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현실병폐를 바로잡기 위한 다산 나름의 주요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반영해놓은 것이다.

이처럼 『경세유표』가 미래의 이상적인 국가시스템을 전반적으로 밝힌 것이라면,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당시 조선의 법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시급한 민생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대증요법으로서 마련된 것이다.
조선의 대표 판례집이라고 할 만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 중 형전(刑典)의 형사판결 조항을 보다 상세히 풀이한 것이다.

『목민심서』 역시 19세기 정치경제적 상황의 변화 속에서 수동적 피지배층에 머물지 않았던 조선후기 민(民)의 변화된 의식과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다. 다산은 소민(小民)인 백성이야말로 군주와 조정대신보다 무서운 상제(上帝)의 명령, 즉 천명(天命)을 들려주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목민심서』는 외견상으로 보면 지방행정 지침서, 실무요령서 정도로 보인다. 목민(牧民)의 다른 표현은 결국 치민(治民)이다. 유학사회에서 정치는 항상 지배 엘리트와 피지배 계층의 관계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목민(牧民)이란 표현이야말로 당시의 정치행위, 통치행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목(牧)이라고 하면 임금을 비롯한 모든 통치자를 가리키지만, 지방수령을 특히 목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목민관 혹은 목령(牧令)이라고 부를 때 ‘근민(近民)’이라고 해서 백성을 직접 상대하는 각 지 수령을 가장 중요한 위정자로서 간주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일국의 국왕과 수령이 비록 통치규모는 다를지라도 지위와 권한이 비슷하다고 보았다. 군현제 하에서 지방수령은 봉건제의 지방영주와도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조선인이 직접 목민서류를 저술하고 발간·유포한 것은 17~19세기 사이였고 조선후기에 목민서에 대한 정치수요가 급증했다. 다산이 밝혔듯이 삼대 기본강령과 육전(六典; 이호예병형공) 체제 그리고 비상시 진황과 구휼을 위한 대비책까지 마련해 일사분란하게 지방행정 및 통치를 위한 지침을 구비해 놓았기 때문에 『목민심서』만큼 체제나 내용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을 기(紀)로 삼고,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을 육전(六典)으로 삼고, 진황(振荒) 1목(目)으로 마무리하였다. 부임에서 해관에 이르기까지 12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편에 6조를 배치했기 때문에 전체 72조로 편성되어 있다. 그런데 특히 책의 이름을 ‘심서(心書)’라고 이름 붙인 것은 ‘목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유배자로서 신분 때문에 목민할 수 없기에 오직 ‘마음’으로 쓴 책이라는 뜻에서 심서를 붙였다는 것이다. 『경세유표』가 이상적 정치시스템을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곧바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 당장의 시급한 민생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작성했다고 밝혔듯이 『목민심서』는 현실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대증요법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특히 민의 사법재판과 관련된 부분은 전문성과 정밀성을 요하는 문제라서 『목민심서』 형전(刑典)에서 주장했듯이 별도로 『흠흠신서』를 마련해 상세히 설명했다.

율기, 봉공, 애민의 3가지 기본강령은 수령 자신의 도덕적 주체 확립과 관련된 것으로 위정자의 개인수양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호예병형공’으로 나누어진 6전은 수령의 구체적 제반업무들을 열거한 것이며, 흉년을 당했을 때 비상시를 위해 진황 편을 따로 편성했다. 12편이 각자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의 비중이나 분량으로 볼 때 6전 부분이 가장 방대하며 길다. 따라서 『목민심서』에서 다산이 『경세유표』의 중앙관제시스템의 삼정승 및 의정부 산하 육조(六曺)의 체제를 강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행정운영시스템으로 6전 체제를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수령 ‘칠사론(七事論)’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수령은 농업 장려, 호구수 증가, 학교증설, 군대정비, 부역의 공평성 확보, 옥사의 공정 처리, 흉악 범죄 예방· 통제 등 전통적으로 강조된 7가지 항목 외에도 다양한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수령칠사론을 대체하기 위한 다산의 6전 36조 편성은 주로 전세(田稅)와 공부(貢賦) 등 민생 및 국가재정 문제를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유배기 다산의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다산은 예전(禮典) 변등(辨等) 조목에 나타난 바와 같이 등급과 위계의 구분이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물론 다산도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노력의 가능성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산은 서얼 문제의 해소, 중인의 사회적 지위 향상, 지방 부유층 중 공로자에 대한 관직 수여 등을 강조했는데, 이 또한 다산이 조선후기 새로 성장하던 서얼, 중인, 부민층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재를 관료기구로 흡수, 자신이 구상한 관료제의 사회적 저변을 확대하려고 한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다산은 철저하게 양천제(良賤制)와 노비제, 즉 양인과 천민의 차별적 신분질서를 인정했고, 양인들 사이에서도 오래된 가문의 사대부들을 특별 대우했다.

『목민심서』와『흠흠신서』의 이념을 볼 때 백성을 가장 두려워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할 대상으로 상정한 것은 분명하지만 젊은 시절 작성한 「원목」이나 「탕론」 정도로 민의 정치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백성의 정치참여를 위한 제도적·방법론적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았다. 특히 대표적 정법서에는 소수 위정자에 의한 계도적·계몽적 정치행위를 가장 중시하게 다루고 있다.
- 백민정 성균관대 교수, “우리시대는 어떤 목민관을 원하는가” 제5강 요약정리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서울카리타스 자원봉사센터 `자원봉사 기본교육`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저녁 7시, 평생교육사 목요 스터디 13차 모임 주제는 자원봉사…
서울카리타스 자원봉사센터에서 출장교육을 진행해 주심.
나는 이미 지난달에 241차 기본교육을 수료했는데…
화학식을 응용한 ‘받아들임과 비움의 영성’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더군.


기본교육을 이수하면 ‘자원봉사자 수첩’이 발급되는데…
교육비 5천원과 사진 1매(3㎝×4㎝)가 필요하다.
이 수첩은 자원봉사활동의 내용을 기록하고 네트워크시스템에 등록하는데 기초가 되는 자료로 활용된다.
수첩 안쪽 여백을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공들여야 할른지…


5월 14일 서울대교구 교구청 별관에서 진행된 ‘등록요원 양성교육’도 이수했지. 등록요원은 각 기관의 소속 자원봉사자를 등록·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인도 캘커타의 성녀 하느님의 몽당연필 마더 데레사 수녀의 헌신에서 유래한 말로, 봉사활동을 하거나 다른 사람이 봉사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신체의 면역력이 높아지는 현상을 ‘테레사 효과’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면역력이란 건 인간의 심리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이다.
진화론의 뜨거운 감자인 이타주의… 애초에 다윈이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해주신 모든 선생님들, 강의와 진행을 맡아주신 자원봉사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개별적으로 교육받기를 원한다면…
일단, 절차에 따라 서울카리타스자원봉사센터 사이트에 가입한 후 상단의 교육안내 메뉴에서 신청하면 된다.

reference - https://www.escvc.or.kr/vtn/user/Education/교육안내.aspx

 자원봉사 기본교육
-장   소: 명동 가톨릭회관 426-1호
-교육비: 5천원
-준비물: 사진 1매
-문    의: 727-2235, 2248

2013년 6월 8일 토요일

서울도서관 한 평 시민 책시장

오늘(2013년 6월 8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에서 6시까지…
서울도서관 정문 앞(구시청건물,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5번출구).
출판사나 중고서점은 물론 일반 참가자들(개인·가족·단체 등)이 판매하는 책을 눈요기 하면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아름다운가게에서는 일반도서 10권에 1만원으로 무지 저렴하지만, 마음에 드는 책 열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하여간 한참동안 발품을 팔아 요런 보물들 일곱권을 8천5백원에 건져올렸지. 종종 사파링 해야겠네.



김훈, 『공무도하』, 문학동네, 2009, 1만1천원
존 라이언ㆍ앨런 테인 더닝, 『녹색 시민 구보 씨의 하루』, 그물코, 2009, 8천원
M. 크레이븐, 『부엉이가 내 이름을 불렀네』, 성바오로출판사, 1994, 3천5백원
김윤희, 『잃어버린 너  1ㆍ2』, 태동출판사, 2002, 각 8천5백원
박지원 외, 『호질/양반전(외)』, 청목, 2002, 5천원
앨빈 토플러, 『부의 미래』, 청림출판, 2006, 1만9천8백원
 

2013년 6월 6일 목요일

박지원, 법고창신의 기풍을 외치다

박지원(朴趾源)은 조부가 우의정까지 지낸 노론 가문 출신으로 16세에 장가를 들면서 장인과 처삼촌(이군문)으로부터 늦게 학문을 배웠다. 1770년(영조46) 34세에 시험 삼아 응시한 초시에 장원을 하여 영조를 알현한 이후 시험 감독관들의 주목을 받았으나, 각박한 벼슬살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이후에는 과거를 보지 않았고, 억지로 권해서 본 과거에서도 답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박지원이 과거를 포기하자 영조의 총애를 얻기 위해 알랑대던 소인배들의 발길이 끊기고 대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홍대용 등 대부분 서얼 출신들과 신분적 차별의식 없이 교우하여 이른바 ‘백탑파’를 형성한다.

40세 되던 해 정조가 즉위하면서, 세손 시절의 정조를 비호하던 홍국영을 비판했던 과거사로 인하여 결국 황해도 금천 연암골로 9년 남짓 피신하여 살았다. 이로부터 그의 호 연암(燕巖)이 유래한다. 「김신선전」에 묘사한 것처럼 연암은 일찍이 우울증이 있었다.

43세인 1780년(정조4) 박지원은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8촌형 박명원을 따라들어가 연경 및 열하 등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내놓았다. 『열하일기』의 액자 형식으로 들어가 있는 소설 「허생전」을 통해 박지원은 생산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조선의 유통구조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50세에 이르러서야 조부의 문음을 통해 낮은 벼슬로 관계에 진출하였고, 55세에 한성판관을 거쳐 안의현감(경상도 함양), 61세에 면천군수(충청도)를 지내면서 백성 위에 군림하는 수령이 아니라 농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실현해 보는 등 진지한 목민관의 역할을 실천한다. 토지 소유를 한정함으로써 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한 한전제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밝히지 않았고, 기존의 대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면천군수 재임 시절에 비어나 속어 같은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하는 박지원의 글을 모방하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여 그 영향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 보수 지배층이 박지원의 문체를 비난하고 그를 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정조가 전통적인 문체로 글을 지어 올리라는 벌(문체반정)을 내리면서 사실상 박지원을 감싸준다. 박지원은 “너무 큰 죄를 지어서 반성한다고 될 것 같지 않다”는 투의 모호한 반성문을 작성했다.

박지원은 상고(尙古)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언어와 문장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 역시 유학자였기에 상도(常道;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맞는 내용을 갗춰야 함을 역설하는데, 이것이 옛 것(상도)를 본받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박지원은 새로운 문체를 사용한 소설을 통해서 기층 백성과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받는 이들의 소박한 삶과 아픔을 대변하고, 지배층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비판했다. 「예덕선생전」·「양반전」·「열녀함양박씨전」 등을 통해 그가 새로운 문체를 가지고 작성한 소설로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추론해 보고, 그의 눈을 빌어 우리 사회를 심도있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 신분이나 지위에 따르는 차별은 없는가?
○ 사회정책이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방향에서 시행되는가?
  ㆍ기존의 방식을 고수한다면 그 방식에는 어떠한 가치가 담겨 있는가?
  ㆍ그러한 가치를 우리는 ‘상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그리고 새로운 것은 ‘상도’를 표현하고 있는가?
○ 기존의 도덕률에 얽매여 인간들의 취향을 재단하지는 않는가?

- 구태환 상지대 교수, “우리시대는 어떤 목민관을 원하는가” 제4강 요약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