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수목원은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③번 출구 고대교우회관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약 5~6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경유하는데, 20~30m 남짓한 종암대교를 건너 직진 도보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지도에서는 세종대왕기념관 맞은편이다. 홍릉근린공원이 목적지가 아니니 헷갈리지 마시기를…
입구를 통과하면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 오른편에 위치한 산림과학관인데…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숲길 전체가 음식물 반입 금지 구역인데도 굳이 딸내미 손에 먹을 것을 들려 입장한 개념없는 엄마들, 밟고 올라서지 말라는 곳에 발을 디뎌보는 아들내미를 방관하는 아빠들… 직원 한사람이 만류하고 제지하고 혼자서 정말 정신없더군.
아래는 산림과학관 로비 바로 앞에 전시된 너와집 사진이다.
중학교 사회1 교과서에 ‘세계의 강수량 분포와 주민 생활’이라는 타이틀로 언급되어 있는 터라 유심히 살펴봤다.
▲너와집
ㆍ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 33호
ㆍ소재비: 강원 삼척시 도계읍 신리
ㆍ축 조: 1/16
ㆍ재 료: 소나무
‘너와집’이란 굵은 소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지붕을 얹은 집을 말한다.
옛날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산간지대의 주민이 살던 집으로 강원도에서는 느예집 또는 능에집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너와의 크기는 일정하지는 않으나 가로 20~30㎝, 세로 40~60㎝이며, 두께는 4~5㎝ 내외다. 지붕에 까치구멍을 뚫었고,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지 못하게 돌이나 통나무를 얹어 놓았다. 대문을 들어서 왼쪽 트인 공간 중심에 마루가 있는데 마루 왼쪽이 사랑방, 오른쪽 부엌과 접해 있는 방을 안방으로 배치하여 난방과 조명에 해당하는 코클(벽난로)이 설치되어 있으며, 외양간과 부엌 사이 공간은 집안일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한쪽에 불씨를 보관하던 시설(화터)이 있다. 주변의 기후와 나무의 성질을 이용한 옛 건축의 좋은 사료다.
이후 코스대로 숲길을 걷다보면 홍릉의 유래에 대해 설명한 이정표와 마주치게 된다.
‘큰물 홍(洪)’자를 쓴 것이 의미심장한데,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홍릉터의 유래
이곳 홍릉(洪陵)은 조선조 말기 제26대 고종황제(이재황: 1852~19019, 재위 44년)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본관 여흥,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께서 묻혔던 곳이다.
명성황후 민씨는 1851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 때 왕비에 간택된 후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하여 민씨 정권을 세우고 개국 정책을 주도하는 등 왕실정치에 간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대원권의 친청·친일정책 등에 반대하고 정치의 실권을 잡기 위하여 정쟁을 벌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충주·장호원 등으로 피신 중 청나라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으로 민씨 일파가 실각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친일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다가 1895년 8월 20일(음)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捕梧樓, 삼포오루)가 보낸 자객에 의하여 경복궁 곤령각에서 난자 시해당한 후 시체가 궁궐 밖 뒷산으로 운반되어 거적에 말려 석유가 부어져 소각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명성황후는 일제의 사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되었다가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을 치른 후 이곳에 묻혀 22년간 홍릉이라 불리어 관리되어 오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종께서 승하하시자 2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현 홍유릉)으로 천장(遷葬), 고종과 합장(合葬)하게 되니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어 현재까지도 이곳을 홍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광릉수목원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한 맛과 멋은 충분했다. 도심 한복판의 숲길 체험… 이것도 세계의 다른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와 차별되는 서울만의 매력과 경쟁력이 될 것이다.
주말 오전 10시 30분, 오후 2시에 가면 숲해설가와 함께 할 수 있다니 시간을 맞추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간만에 피톤치드(phytoncide) 만땅 채우고 왔으니 이번 한주도 열심히 살아봐야겠지.
지도에서는 세종대왕기념관 맞은편이다. 홍릉근린공원이 목적지가 아니니 헷갈리지 마시기를…
입구를 통과하면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 오른편에 위치한 산림과학관인데…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숲길 전체가 음식물 반입 금지 구역인데도 굳이 딸내미 손에 먹을 것을 들려 입장한 개념없는 엄마들, 밟고 올라서지 말라는 곳에 발을 디뎌보는 아들내미를 방관하는 아빠들… 직원 한사람이 만류하고 제지하고 혼자서 정말 정신없더군.
아래는 산림과학관 로비 바로 앞에 전시된 너와집 사진이다.
중학교 사회1 교과서에 ‘세계의 강수량 분포와 주민 생활’이라는 타이틀로 언급되어 있는 터라 유심히 살펴봤다.
▲너와집
ㆍ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 33호
ㆍ소재비: 강원 삼척시 도계읍 신리
ㆍ축 조: 1/16
ㆍ재 료: 소나무
‘너와집’이란 굵은 소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지붕을 얹은 집을 말한다.
옛날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산간지대의 주민이 살던 집으로 강원도에서는 느예집 또는 능에집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너와의 크기는 일정하지는 않으나 가로 20~30㎝, 세로 40~60㎝이며, 두께는 4~5㎝ 내외다. 지붕에 까치구멍을 뚫었고,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지 못하게 돌이나 통나무를 얹어 놓았다. 대문을 들어서 왼쪽 트인 공간 중심에 마루가 있는데 마루 왼쪽이 사랑방, 오른쪽 부엌과 접해 있는 방을 안방으로 배치하여 난방과 조명에 해당하는 코클(벽난로)이 설치되어 있으며, 외양간과 부엌 사이 공간은 집안일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한쪽에 불씨를 보관하던 시설(화터)이 있다. 주변의 기후와 나무의 성질을 이용한 옛 건축의 좋은 사료다.
이후 코스대로 숲길을 걷다보면 홍릉의 유래에 대해 설명한 이정표와 마주치게 된다.
‘큰물 홍(洪)’자를 쓴 것이 의미심장한데,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홍릉터의 유래
이곳 홍릉(洪陵)은 조선조 말기 제26대 고종황제(이재황: 1852~19019, 재위 44년)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본관 여흥,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께서 묻혔던 곳이다.
명성황후 민씨는 1851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 때 왕비에 간택된 후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하여 민씨 정권을 세우고 개국 정책을 주도하는 등 왕실정치에 간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대원권의 친청·친일정책 등에 반대하고 정치의 실권을 잡기 위하여 정쟁을 벌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충주·장호원 등으로 피신 중 청나라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으로 민씨 일파가 실각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친일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다가 1895년 8월 20일(음)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捕梧樓, 삼포오루)가 보낸 자객에 의하여 경복궁 곤령각에서 난자 시해당한 후 시체가 궁궐 밖 뒷산으로 운반되어 거적에 말려 석유가 부어져 소각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명성황후는 일제의 사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되었다가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을 치른 후 이곳에 묻혀 22년간 홍릉이라 불리어 관리되어 오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종께서 승하하시자 2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현 홍유릉)으로 천장(遷葬), 고종과 합장(合葬)하게 되니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어 현재까지도 이곳을 홍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광릉수목원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한 맛과 멋은 충분했다. 도심 한복판의 숲길 체험… 이것도 세계의 다른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와 차별되는 서울만의 매력과 경쟁력이 될 것이다.
주말 오전 10시 30분, 오후 2시에 가면 숲해설가와 함께 할 수 있다니 시간을 맞추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간만에 피톤치드(phytoncide) 만땅 채우고 왔으니 이번 한주도 열심히 살아봐야겠지.